초지진(草芝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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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초지진 |
한글표제 | 초지진 |
한자표제 | 草芝鎭 |
관련어 | 강도(江都), 해방(海防), 진보(鎭堡), 돈대(墩臺), 초지돈(草芝墩), 섬암돈(蟾巖墩), 장자평돈(長者坪墩), 병자호란(丙子胡亂), 홍중보(洪重普),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요호[雲揚號]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장소 | 강화도(江華島) |
관련 인물 | 이렴(李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초지진(草芝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39년 9월 12일, 『고종실록』 8년 6월 1일 |
조선후기 강화도에 해방(海防)을 위해 설치한 진보(鎭堡)의 하나.
개설
17세기 중반 설치된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최남단 입구에 설치된 진보의 하나로서 군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컸다. 따라서 그 아래 초지돈 등 3곳의 돈대를 관할하에 두고 만호의 지휘하에 300여 명의 방어 군사를 두었다. 19세기 중반인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당시에는 미 함대와 포격전을 벌이고 미 해병대가 최초로 상륙하여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이후 1875년(고종 12) 일본의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침입한 사건 당시에도 포격전을 벌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화해협인 이른바 염하(鹽河) 입구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따라서 서해안을 따라 남쪽에서 한성으로 올라오는 선박은 반드시 초지진 앞을 통과하게 된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입구를 통제하고 아울러 그 접근을 경고하는 군사 방어 시설이다.
변천 및 현황
초지진은 원래 경기의 안산에 설치되었던 진이었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왕의 피난처로 정해졌던 강화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1656년(효종 7) 강화유수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강화의 동남쪽 해안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설치하였다. 최초에는 초지진의 방어 책임자로 감목관(監牧官) 1인이 겸임하여 임명되었으나 방어체제의 강화를 위해 1665년(현종 6) 서필원(徐必遠)의 건의로 진장(鎭將)으로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가 임명되었다. 1679년(숙종 5) 강화도 해안에 48곳의 돈대(墩臺)가 축조되면서 초지진 아래에 초지돈(草芝墩), 섬암돈(蟾巖墩), 장자평돈(長者坪墩) 등 3곳의 돈대가 소속되었다. 그리고 군관(軍官), 목자(牧子) 등 다양한 명목의 군사 300여 명을 배치하였다. 1763년(영조 39)에는 만호인 진장을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영조실록』 39년 9월 12일).
강화해협의 입구에 위치한 초지진은 19세기 중반인 1871년 미국 함대의 강화도 공격인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가 상륙하여 최초 접전을 벌인 격전지로서, 미국 함대의 함포 공격 등에 의해 초지진의 성벽과 성첩 등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후 강화해협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874년 여러 곳에 포대(砲臺)를 건설하여 초지진의 남쪽과 북동쪽 일대에도 각각 6곳의 포혈(砲穴)을 가진 포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875년에는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초지진에 불법으로 접근하고 초지진의 조선군과 포격전을 벌여 초지진의 방어 시설과 포대는 다시금 크게 파괴되었다. 얼마 뒤 초지진이 폐쇄되어 돈대의 터와 성곽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1973년에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으나 섬암돈과 장자평돈은 경작지와 목장 등으로 바뀌어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
돈대는 대체로 방형이나 원형으로 축조되는데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여 조총 등을 사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아래에는 불랑기(佛狼機) 등의 화포를 사격할 수 있는 포좌(砲座)가 3~4개소 있어 강화해협을 통해 접근하는 적의 선박을 인접 돈대와 함께 교차 사격할 수 있었다. 숙종 초 돈대를 최초 건설할 당시 책임을 맡았던 김석주(金錫冑)의 기록에 따르면, 초지진에 속한 섬암돈 등 세 돈대는 모두 방형으로서 둘레는 90보 전후였고 치첩(雉堞)의 수효는 40개 이내였다고 한다. 복원이 되어 형태가 남아 있는 초지돈은 둘레가 114미터이고 높이는 4미터 정도에 둘레가 114미터이다. 형태는 타원형으로 포좌가 3군데, 총좌가 100여 개 있다. 섬암돈과 장자평돈은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포좌의 수효나 둘레 등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66년(고종 3)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과 조선에 대한 통상을 강요할 목적으로 1871년(고종 8) 6월 10일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미 함대가 초지진에 상륙을 시도하자 초지진의 조선군은 미 함대에 포격을 가하였다. 미 함대는 초지진에 2시간에 걸쳐 포격을 가하여 초지진의 진지가 대부분 파괴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조선군이 일단 초지진에서 물러나자 상륙한 미 해병대가 이곳을 무혈점령하고 초지진 서북쪽에 야영지를 설치하여 조선군의 야간 공격에 대비하였다. 초지진 첨사이렴(李廉)은 병력 수십 명을 이끌고 자정 무렵 미 해병대 숙영지에 야습을 감행하였으나 미군의 저항에 큰 피해를 입고 광성보 방면으로 후퇴하였다(『고종실록』 8년 6월 1일).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해동지도(海東地圖)』
- 『강도부지(江都府誌)』
- 『식암유고(息庵遺稿)』
- 서인한, 『병인·신미양요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2002.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강화도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돈대편)』, 1999.
-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도의 진보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9,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