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靑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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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제를 지낼 때 올리던 제물의 하나로,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개설

등은 암청색, 배는 은백색인 등 푸른 생선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 값이 싸고, 기름진 맛이 있어 음식 재료로 많이 활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종묘의례 11월의 천신(薦新) 물품이었다. 동해안 지역의 겨울철 별미인 과메기의 원재료이다.

원산지 및 유통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함길도 등에 소속된 16곳 군현의 토산이다. 함길도와 강원도,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남·서해안에서 모두 어획량이 많았다. 청어(靑魚)는 표면의 색이 청색을 띠어 붙여진 이름이다.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저렴하나 맛이 좋아 가난한 선비들이 자주 사 먹으니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라는 의미에서 ‘비유어(肥儒魚)’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것에서 유래하여 청어를 ‘비웃’이라고도 하였다.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청어의 종류가 설명되어 있다. 4가지가 있는데 북도(北道)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고, 경상도에서 잡히는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에서 잡히는 것은 조금 작고, 해주에서는 2월에 잡히는데 매우 맛이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말에는 쌀 1되에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牧隱)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그것을 한탄하였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1말에 청어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괴이하다고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비우어(肥愚魚)는 서·남해에서 생산되는데 통칭 청어라 한다. 서수라(西水羅)는 동해에 가까운데 더러 청어가 잡힌다. 길이는 1자 남짓하고 너비는 5~6치 되며 색깔은 짙푸른데 구우면 흘러나온 기름이 불을 끌 정도이고 맛은 보통이 아니다. 또 심북(深北)에서 산출되는 청어는 생김새가 웅어[葦魚]와 같은데 기름기가 많아서 구워 먹기 어렵지만 이것이 진품(眞品)이다.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모두 잡히는데 그 회유로(洄游路)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청어는 북도에서 처음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의 동해변을 따라 내려와서 11월에 경상도에서 잡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冬至) 전에 서울에 도착해야 비싼 값을 받는다. 모든 연해에는 청어가 있다.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 간다. 청어는 서·남해를 경유하여 4월에 해주까지 와서는 더 북상하지 않고 멈춘다. 그러므로 어족(魚族)이 이곳처럼 많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11~12월에 잡은 청어는 진상되었다(『중종실록』 4년 3월 16일). 경상도에서 잡힌 청어는 11월 천신 물품으로 올렸고, 황해도와 충청도에서는 정월에 청어를 종묘에 올렸다(『세종실록』 2년 11월 22일). 『명재유고(明齋遺稿)』「잡저」편에 기록된 제례유서(祭禮遺書)에는 겨울에 청어를 올린다. 모든 천신은 반드시 초하루나 보름, 절일에 올린다. 다만 일정한 때 없이 아무 때나 얻게 된 것은 새벽 참알(參謁) 때 올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청어가 진상되는 도중 유통과정에서 부패하여 담당자들에게 그 죄를 묻기도 하였다. 그래서 경상도에서 진상하는 생청어의 운송에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월 17일).

진상된 청어는 궁중 의례에 사용되었고,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하사되었다. 태종은 이방간(李芳幹)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주고, 월봉미(月捧米)·감장(甘醬)·건청어(乾靑魚) 등의 물건을 연속하여 주게 하였다(『태종실록』 17년 4월 24일).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이덕무(李德懋)가 여러 번 하사받은 청어의 양까지 기록되어 있다.

청어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심한 자원 변동을 보인 어족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헌에 청어 자원 변동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중종대에 서해안의 위도는 예전부터 청어가 대량으로 생산되던 곳이었으나 청어가 잡히지 않았다(『중종실록』 6년 4월 8일).

『징비록(懲毖錄)』에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요즈음 와서 10년이 넘도록 근절되어 생산되지 않고, 요동(遼東) 바다로 옮겨 가서 생산되는바, 요동 사람은 이 청어를 신어(新魚)라고 한다고 하였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봄철 서·남해에서 항상 다산하던 청어가 1570년(선조 3) 이후부터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도 100여 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絶産)되었는데 정조대 이후에 나타나 조금 흔해졌다고 하였다.

180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청어 자원은 곳곳에서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해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고종 재위 30여 년간 경상감사들은 천신하고 진상할 산 청어를 잡으려 밤낮으로 어망을 던졌으나, 갑자기 고기의 흔적마저 사라져서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으므로 황공하여 죄를 기다린다는 장계를 계속하여 올렸다. 1900년대 들어 청어어장은 경상도의 동북연안으로 국한되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익정공(翼貞公)한용귀(韓用龜)가 청어를 좋아하여 끼니때마다 반드시 밥상에 올리게 하였다. 당시 청어 1두름[級]에 값이 3~4문(文)밖에 되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중국 선박이 해서(海西)에 가득 몰려다니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잡은 물고기를 매양 높은 값으로 사서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비록 신분이 존귀한 자들이라도 먹을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또한 금물(禁物)을 몰래 매매하는 폐단이 있어 변방에서 실랑이가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조정의 무궁한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고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체로 해주에서 나는 것이 온 나라에 넘친다고 하였다. 기미년인 1799년(정조 23) 이후부터 20미(尾)를 엮어서 1급으로 하는데 동전 2~3문과 바꾸었다. 순조 때의 경인·신묘 연간인 1830년(순조 30)∼1831년(순조 31)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고 하여 청어 자원의 변동과 이에 따른 가격 등락을 짐작케 한다. 청어를 잡은 어민들은 수확에 대한 세금을 납부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재용」편의 해세(海稅)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청어전(靑魚箭)의 어장은 청어휘리(靑魚揮罹)가 15냥, 세망(細網)이 5냥이었다.

청어는 일본과의 교역품 중 하나였다. 대마도 태수 종성직(宗盛職)에게 건청어(乾靑魚) 100두름, 쌀·콩·소주 등의 물품을 여러 차례 하사하고(『세종실록』 24년 7월 1일), 그의 모친이 죽었을 때에도 부의와 실화의 품목으로 보냈다(『세조실록』 7년 4월 22일). 또 일기주(一岐州)의 지좌원의(志佐源義)가 충성하니 건청어(乾靑魚) 2,000미, 대구어(大口魚) 200미, 건이어(乾鯉魚)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단종실록』 2년 7월 30일).

연원 및 용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앙엽기7(盎葉記七)」에는 송완(宋琬)의 『안아당집(安雅堂集)』을 인용하여 청어는 길이가 1자도 채 되지 않는데, 암청색 등성이에 뺨이 붉고 입춘(立春)이 지난 뒤에 잡을 수 있다. 저자에 막 나오면 값이 생각보다 비싸도 잠깐 사이에 다 팔리는데, 사실 1마리의 값은 10전(錢)도 채 되지 않는다. 청어죽(靑魚粥)이라 하여 바닷사람들이 식사로 대용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청어의 제철은 겨울철인 2~3월이고, 죽·탕·지짐·구이·젓갈 등으로 이용되었다. 청어죽은 청어를 익혀서 생선살을 바르고 쌀과 함께 죽을 쑤면 된다. 『주식방문(酒食方文)』에 기록된 청어소탕은 매우 크고 좋은 청어를 2~3덩이로 잘라 청어알과 이리를 내어 소를 만드는데, 알이 많으면 사각사각하여 좋지 아니하니 알은 적게 하고 이리는 많이 한다.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다져 만두소같이 하여 알과 이리, 양념을 함께 섞어 청어 속에 다시 넣어 가루즙을 하고 달걀을 묻혀 기름에 지진다. 장국을 끓이고 넣어 먹을 때에 밀가루를 약간 풀어 끓이면 좋다. 산란기에는 청어알의 양이 많고, 영양이 풍부한데 무엇보다 독특한 식감이 있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1~2월에 쑥을 뜯어 쑥탕을 끓일 때 꿩고기를 잘게 다져 넣거나 달걀에 기름을 놓고, 마른 청어를 잘게 뜯어 넣어 끓이면 매우 좋다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청어의 두 눈을 꿰어 서로 통하도록 말갛게 마주 비치도록 말린 것을 관목(貫目)이라 하는데 그 맛이 기이하다고 하였다. 관목이나 말린 은어에 간장을 넣어 장을 지지는데 다 끓인 후에 고춧가루를 곱게 빻아 체에 친 것을 한 자밤 그릇에 담고, 기름 두어 술을 쳐서 개어 풀면 국빛이 아름답고 비위에 당기어 붉은 구슬을 흩은 듯하다고 하였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자반 청어가 기록되어 있다.

청어젓갈은 비웃젓이라고도 하였는데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시의전서』, 『보감록(寶鑑錄)』 등에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청어를 발 위에 펴 놓고 소금을 뿌린 후 켜켜이 놓고, 돗자리를 덮어 밤을 재우면 생선즙이 발 아래로 다 빠진다. 그러면 독 안에 비웃과 소금을 켜켜이 넣어 담그는데, 해가 묵어도 머리가 떨어지지 않고 좋다고 하였다. 『음식디미방』 맛질 방문에서는 청어를 물에 씻으면 못쓰게 되니, 가져온 그대로 자연스럽게 닦아 청어 100마리에 소금을 2되씩 넣되, 끓이지 않은 물기는 절대 금하고 독을 물기가 없고 단단한 땅[燥强]에 묻으라고 당부하고 있다. 연산군대에 제주도 내섬시(內贍寺)의 종 장회이(張廻伊)가 일본에 표류하여 보고 겪은 일을 아뢴 내용을 보면, 해변에 사는 왜인들이 고등어·오징어·방어·도미·대구·청어·상어 등 날것을 소금에 절인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어젓은 일본에서도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7년 1월 30일).

영조대에 이지항(李志恒)이 부산에서 영해(寧海)로 가던 중 파선되어 일본의 북해도(北海道)까지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기록인 『표주록(漂舟錄)』에는 일본의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고기[魚]들이 매달려 있는데 거의 대구, 청어라고 하였다. 순조대의 문신 김경선(金景善)이 북경을 다녀온 기행록(紀行錄)인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팔리보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을 때 청어를 구워 올렸는데, 마치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처럼 맛이 입에 맞았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청어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산림경제(山林經濟)』구급(救急)방에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인용하여 급후폐(急喉閉)에 토하는 법은 겨울에는 청어담(靑魚膽)에다 백반(白礬)을 넣고 복용할 때 백초상(百草霜)과 볶은 소금을 조금 더하여 식초에 타서 오리털로 약을 찍어서 담을 토해 내도록 인도한다. 만일 어담(魚膽)이 없으면 백반(白礬) 반 냥(兩)에 파두(巴豆) 10매를 함께 말려서 파두는 버리고 백반만 쓰는데, 매양 1자를 목구멍 속에 불어 넣어 담혈(痰血)을 토해 내게 하면 즉시 낫는다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이 통사김시우(金時遇)를 보내어 상왕인 태종에게 청어 어금니를 박은 띠를 드리니, 상왕이 김시우에게 옷 1벌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1년 9월 15일). 청어는 위턱에는 이가 없고 아래턱에만 이가 있는데, 이를 이용하여 혁대를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규합총서(閨閤叢書)』
  •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도문대작(屠門大嚼)』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명물기략(名物紀略)』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목은집(牧隱集)』
  • 『보감록(寶鑑錄)』
  • 『산림경제(山林經濟)』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시의전서(是議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원직지(燕轅直指)』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옥담사집(玉潭私集)』
  • 『완당전집(阮堂全集)』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일성록(日省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산어보(玆山魚譜)』
  • 『주식방문(酒食方文)』
  • 『지봉유설(芝峰類說)』
  • 『징비록(懲毖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표주록(漂舟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