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개시(柵門開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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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금 지대 책문에서 일어난 조선과 청국 사이의 무역.

개설

책문(柵門)은 조선연행사에 대한 출입국 절차와 물품 통관 및 관세 부과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조선연행사가 책문에 들어오면 청국 상인과 조선 상인 사이에 대규모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 정부가 이 무역을 공인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명칭이 달랐는데, 공인 무역을 책문개시(柵門開市)라 하였고, 비공인 무역을 책문후시(柵門後市)라 하였다.

내용 및 변천

조선 사행이 오는 때를 맞추어 책문에 중국 각지의 상인들이 여러 물건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산해관 동쪽 각 지방의 상인은 물론이고 남방 상인들도 우가장의 바다를 통하여 들어왔으며, 북경 상인들도 각기 물건을 싣고 책문으로 달려왔다. 이곳에서 교역된 한 번의 액수만도 은 40,000~50,000냥을 넘었으며, 교역품에는 정부가 인정하는 물건 이외에도 금지하는 물건도 많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여마제(餘馬制)와 연복제(延卜制)였다.

여마제는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들어가는 중에 방물과 세폐를 실은 말이 혹 쓰러질 것에 대비하여 10개의 짐꾸러미를 실을 정도의 말을 여분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주부는 여마에 은 몇 냥을 받고 수를 제한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였고, 따라서 그중에는 정부가 금하는 물품을 몰래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연복제는 원래 사행이 연경에서 책문으로 되돌아올 때 의주부에서 빈 말을 보내 사행원역의 복물을 운송해 왔던 제도였다. 그러나 연복제는 점차 빈 말의 입송(入送)을 기회로 하여 많은 은화를 책문으로 가지고 들어가 교역하고, 다시 사행의 짐이라는 명분으로 엄격한 검사 없이 인마에 물건을 싣고 돌아오는 데 이용됨으로써 대청교역의 한 방편이 되었다.

책문무역은 조선 정부가 교역을 공인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같은 교역이 개시와 후시로 구분되어 인식되었다. 예컨대 공인 이전 책문후시는 사행 과정 중의 여마제와 연복제를 이용하여 이루어졌어도 모두 밀무역이었다. 그러나 공인 이후 책문개시는 의주부에 납세만 하면 공인된 사무역의 범주에 들었다. 책문무역의 공인은 역관과 사상(私商) 사이의 갈등 및 의주부 재정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였다.

책문후시의 공인은 1707년(숙종 33)에 공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0년도 채 안 되어 책문교역의 공인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나, 1728년(영조 4) 연복제에 의한 책문무역은 엄금되었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에는 책문무역이 다시 공인되었다. 이때 책문무역은 의주 상인에게만 무역의 권리를 주는 것이었기에 ‘만상후시’라는 별칭이 생겼다. 연경으로 가져가는 물건을 연화(燕貨), 책문에서 교역되는 물건을 책화(柵貨)로 구분하고 거래량을 규정하였다. 이때 제정한 「비포절목(比包節目)」은 규정된 교역량을 잘 준수하도록 감시 통제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규정을 어겨 무역하려는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교역이 일어난 곳은 책문을 통과해 만나는 책문촌이었다고 추측된다. 18세기 초반 김창업은 책문 안에는 성장(城長)의 처소, 음식점과 술집, 민가를 합쳐 대략 10여 호의 초가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창업은 ‘몇 리 바깥에서 책문 안을 바라보았을 때 조선 역행(曆行)이 사 놓은 면화 수십만 근이 산처럼 쌓여 웅장하였다.’고 술회할 만큼 엄청난 물량이 교역되었다.

18세기 후반 박지원은 “책문 안에는 수많은 민가가 번듯하고 네거리가 쭉 곧게 펼쳐져 있으며,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수레들이 길에 질펀하여 그 만듦새가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책문이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앞으로 지나갈 도시가 책문보다 더욱 번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보다 하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해 진다.”고 하였다. 19세기 중반 서경순은 “책문을 볼 때는 남산골 샌님들의 100냥짜리 초가 같더니 책문 안 시전을 우리나라 종로의 육의전에 비교해 보면 10배, 100배가 된다. 겉으로는 가난해 보이나 실속은 부자”라고 하였다.

책문무역은 조선 사행단이 연경으로 들어갈 때보다는 돌아 나올 때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사행이 돌아올 때는 이들의 짐을 받아가기 위한 인마가 책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며, 사행의 정식 관원이 나간 뒤에도 여러 날 책문에 머물면서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열하일기(熱河日記)』
  • 『중경지(中京誌)』
  • 『부연일기(赴燕日記)』
  • 『연원직지(燕轅直指)』
  • 『연행일기(燕行日記)』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 「조선후기 압록강과 책문 사이 봉금지대에 대한 역사·지리적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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