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문자발(彩紋磁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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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려 넣은 자기(瓷器) 발(鉢).

개설

채문자발(彩紋磁鉢)은 무늬가 그려진, 자기로 만든 발이다. 잔이나 완보다 입지름이 넓고 높이가 높은 발을 백자나 청자로 만들고 무늬를 그렸다. 채문자발은 단순히 자발이라고만 언급되어 청자인지 백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름에서 그릇에 무늬가 채색된 그릇이라는 겉모습의 특징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채문자발은 그림을 그린 백자발이거나 문양이 시문된 분청자발이었을 것이다. 중국사신이 채문자발을 요구한 시점이 1429년(세종 11)이므로 채문자발이 분청자기였다면 주로 상감 기법과 인화 기법으로 문양이 시문되었을 것이다(『세종실록』 11년 7월 9일).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자기라는 용어가 백자와 청자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되었다. 특히 전국에 자리한 139개의 자기소(磁器所)에서는 대부분 분청자를 제작하였는데 일부는 백자도 함께 만들었다. 백자 역시 자기, 사기(沙器) 등으로 불렸으므로 채문자발이 백자였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초기 기록에 명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백자를 주로 자기로 언급했던 점과 사기가 자기의 속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채문자발은 주로 백자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채문자발이 백자였다면 백자에 그려진 문양은 청화, 철화, 동화 등의 안료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전기의 청화백자(靑畫白磁)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456년(세조 2)의 연호(年號)가 있는 청화백자지석(靑畫白磁誌石)인데, 그 전에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으므로 1429년에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채문자발은 청화백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 왕실에 선물한 물품 중에는 여러 점의 청화백자가 포함되었다. 명나라의 청화백자는 모두 ‘청화’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었으므로, 황제의 하사품을 전달하는 명나라의 사신이나 조선의 왕과 신하들 모두 청화백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물품이 청화로 그림을 그린 백자였다면 채문자발이 아닌 청화백자라고 구체적으로 일컬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채문자발로 언급된 그릇은 청화기법 이외의 방식으로 문양이 채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420년대에는 주로 분청자가 전국적으로 제작되었다. 고려청자에 시문(施紋)되었던 모란문·연화문·당초문과 함께 다양한 장식문이 상감 기법으로 시문된 분청자가 유행하였으며, 인화 기법으로 국화문·연주문·원권문 등을 시문한 분청자도 제작되었다. 1429년에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채문자발이 분청자였다면 인화 기법과 상감 기법으로 문양이 시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제작한 분청자는 그릇에 가득 차게 문양을 시문하였으므로 마치 채색한 것과 같은 결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형태

백자에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코발트 안료를 이용한 청화 기법 외에도 산화철을 이용한 철화 기법과 산화동을 이용한 동화 기법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청자에 철화 기법과 동화 기법으로 다양한 문양을 시문하였다. 산화철 안료와 산화동 안료는 조선에서 스스로 수급이 가능하여 코발트 안료처럼 명나라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산화철 안료로 시문된 문양은 완성된 이후에 짙은 갈색이나 흑색을 띠었다. 산화동 안료를 사용한 문양은 붉은색 계통으로 발색되는데, 백자가 완성되는 온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안료가 휘발하는 단점이 있다. 또한 백자가 구워지는 과정에 산소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유의 붉은색 대신에 초록색이 감도는 회색으로 발색된다. 이처럼 산화동은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안료여서, 실제로 조선전기에 제작된 동화백자는 매우 적은 편이다. 따라서 채문자발은 청화백자나 동화백자보다 철화 기법으로 문양이 그려진 백자로 추정할 수 있다.

코발트, 산화철, 산화동 등의 안료로 백자에 문양을 그리는 방식은 유하채(釉下彩) 기법이라고 한다. 문양을 시문하는 과정이 유약을 시유하기 전에 이루어지므로 붙은 이름이다. 유하채 기법에서는 초벌구이한 백자의 표면에 문양을 그리며, 그 위로 유약을 시유한다. 문양을 그린 백자를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유약이 녹아 투명하게 변하고 그 아래에 그려진 문양이 특유의 발색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달리 완성된 백자의 유약층 위에 다양한 색깔의 에나멜로 그림을 그린 후에 낮은 온도로 다시 구워 내는 방식은 유상채(釉上彩) 기법이라고 한다. 유상채 기법은 유럽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다양한 색깔을 내기 위하여 색유리 가루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명나라 전반에는 백자에 화려한 색깔을 더하기 위하여 붉은색과 초록색의 유상채 안료를 사용하였다. 원나라에서 제작된 일부 남유자기(藍釉瓷器)는 완성된 이후 푸른색의 표면에 금선(金線)으로 문양을 시문하여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그 밖에 조선전기 백자의 시문 방식으로는 음각 기법과 흑상감 기법이 있다. 두 기법 모두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조각하거나, 음각 선에 흑색의 흙을 감입하는 방식으로 문양을 표현하였다.

음각 기법으로 만들어진 문양은 단순하게 조각칼로 백자의 표면을 파내는 방식으로 묘사되므로 별다른 채색의 효과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음각 기법은 채문자발이라는 용어에 담긴 채색된 문양이라는 특징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흑상감 기법으로 시문한 문양은 겉모습이 마치 채색된 것처럼 보이므로 채문자발의 문양을 시문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상감 기법의 전통을 이어 다양한 문양을 시문한 여러 가지 기종의 상감백자를 제작하였다. 특히 백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표현한 문양은 흑백 대비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상감백자는 우선 백자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긴 다음 파낸 부분에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검은색의 흙을 채워 넣는다. 그다음에 백자의 표면을 말끔하게 깎아내고 초벌로 구워낸다. 초벌로 구워진 백자에 유약을 시유한 다음 다시 번조하여 완성한다.

완성된 상감백자의 문양은 검은색이거나 짙은 암갈색으로 드러나며, 철화백자에 비해 선이 가늘고 예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전기에 제작한 상감백자에는 주로 연꽃·모란꽃 등을 당초문과 함께 시문하였으며, 펼쳐진 꽃잎의 끝부분은 철화 기법을 추가로 사용하여 문양의 표현을 더욱 화려하게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감백자는 당시 명나라에서는 제작하지 않았던 조선만의 특징이었다.

상감 기법으로 만든 백자는 주로 경기도 광주의 가마터와 경상도의 일부 가마터에서만 제작되었는데, 1420년대에 명나라가 요구한 백자는 주로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되었다. 15세기 전반에 경기도 광주는 조선 왕실이 사용하는 백자를 제작했다(『세종실록』 7년 2월 15일). 채문자발이 만약 상감백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제작지 역시 경기도 광주였을 것이다.

채문자발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1429년에 이루어진 조선의 자기 생산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채문자발은 상감 혹은 인화문이 시문된 분청자발이거나 철화 혹은 상감백자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2.
  • 윤용이, 『韓國陶瓷史硏究』, 문예출판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