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말(眞末)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에 밀가루를 가리키는 한자어.

개설

밀가루는 한자로 면(麵)이라고도 하지만 국수와 혼동되어 잘 쓰지 않았다. 말(䴲)도 밀가루를 뜻하지만 통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진말(眞末)’이란 한자어를 사용하였다. 진말은 가루 중에서 가장 좋다는 뜻이다. 쌀가루나 메밀가루와 달리 밀가루에는 글루텐(gluten)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반죽이 잘 되었다. 한반도에는 겨울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만 재배되었는데, 생산량과 품질이 봄밀보다 좋지 않았다.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서 백성들은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가루 중의 가루라는 의미로 진말이란 말이 쓰였다.

원산지 및 유통

밀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남부의 카프카스이다. 밀의 품종은 크게 봄밀과 겨울밀로 구분한다. 봄밀은 연간 평균기온이 3.8℃이면서 여름 평균기온이 14℃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다. 다만 여름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서는 봄밀이 재배되지 않는다. 봄밀은 중국 대륙의 화북지역 북쪽 건조한 지대에서 잘 자란다. 이에 비해 겨울밀은 중국대륙의 양자강 북쪽 화북지역과 위도가 같은 한반도의 서북지역과 중부지역 일부에서 재배된다. 조선시대에는 밀농사가 가능한 곳이라 해도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늦가을에야 파종을 했다. 음력 6월 보름 유두를 앞두고 밀을 수확했다. 그래서 유두절에 밀가루로 만든 만두와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연원 및 용도

『열하일기(熱河日記)』 「성경잡지(盛京雜識)」에 면은 우리나라에서 진말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진말은 음식을 만드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왕실의 제향에 올라가는 구이(糗餌)는 본래 말린 쌀과 보리로 만들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쌀가루에 진말을 섞어 끓여서 만들었다(『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숙종 때 홍현보(洪鉉輔)는 기신제(忌辰祭)와 오명일(五名日) 절사(節祀)의 선품(饍品)을 단지 유밀과와 두부탕만으로 지내는데, 이것은 불교의 유습(謬習)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소선의 경비 중 반 이상이 유밀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꿀과 밀가루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숙종실록』 45년 4월 30일). 고려시대에도 유밀과를 제향과 잔치에서 너무 많이 사용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유밀과에 들어가는 밀가루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기도 했다.

영조 때 김응순(金應淳)은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는 문제에 대해 반대 상소를 하였다. 예법에 맞추어 잘 운영되고 있는 제사와 제수 장만을 경비를 절약한다는 명분으로 줄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그가 예로 든 것이 다식(茶食)과 다과(茶果) 그리고 진말이다. 이것의 양을 줄인다고 해서 큰 절약이 아니라고 했다(『영조실록』 40년 8월 2일). 이 주장은 오히려 진말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제수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1719년(숙종 45) 9월,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된 것을 경축하는 의미로 올린 진연(進宴)에서 대전과 세자궁을 위해 차린 별행과상(別行果床)에 오른 소약과(小藥果)·홍세한과(紅細漢果)·백세한과(白細漢果)·백은정과(白銀丁果)·분송화다식(粉松花茶食)의 주재료는 진말이었다. 다식과 다과 음식 외에도 진말은 만두와 밀국수와 같은 음식의 주재료로 쓰였다.

참고문헌

  • 『[기해]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
  • 『열하일기(熱河日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