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서(地理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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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지리서 |
한글표제 | 지리서 |
한자표제 | 地理書 |
하위어 | 양택지리서(陽宅地理書), 음택지리서(陰宅地理書) |
동의어 |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 풍수지리서(風水地理書) |
관련어 | 『감룡경(撼龍經)』, 『동림조담(洞林照膽)』, 『명산론(明山論)』, 『의룡경(疑龍經)』, 『장서』, 『지리문정(地理門庭)』, 『지리신법(地理新法)』, 『착맥부(捉脈賦)』, 『청오경(靑烏經)』, 『탁옥부(琢玉斧)』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김혜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지리서(地理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4년 10월 4일, 『세종실록』 12년 8월 21일, 『세종실록』 14년 10월 19일, 『세종실록』 15년 7월 3일, 『세종실록』 15년 윤8월 29일, 『세종실록』 23년 8월 27일, 『세종실록』 24년 9월 14일, 『세종실록』 25년 2월 23일, 『세종실록』 26년 12월 15일, 『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연산군일기』 1년 1월 10일 |
풍수지리 관련 내용과 이론을 기록한 풍수지리서.
개설
풍수지리는 땅 속의 생기를 활용함으로써 인사의 길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특유의 논리가 있는데, 외견상 우리 눈에 비친 산수와 길복의 관계를 언뜻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풍수지리는 일종의 오랜 경험과학으로서 그 선험적 내용을 후세에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서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지리서이며, 역사적으로 그 문헌은 매우 다양하며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문헌도 제각각이었다.
풍수서적의 많음을 흔히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汗牛充棟]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풍수서적이 많은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인용되는 지리서도 그 숫자를 모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지리서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고, 고려의 지리업과 조선의 지리학에 채택된 풍수서만이 고증된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는 전문 풍수학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과시과목이 따로 있었고, 이외에도 풍수지리 내용과 이론을 기록한 수많은 전문 지리서가 있었는데 특히 세종대에 그 명칭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태종대에는 한양과 무악 가운데 어느 곳을 도성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각종 지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태종실록』 4년 10월 4일). 또한 세종대에 시작된 헌릉(獻陵) 단맥 논의를 비롯해서 이후 풍수지리를 주제로 한 논의마다 다양한 지리서의 내용이 그 증거로 활용되었다(『세종실록』 12년 8월 21일)(『세종실록』 14년 10월 19일)(『세종실록』 15년 7월 3일)(『세종실록』 15년 윤8월 29일)(『세종실록』 23년 8월 27일)(『세종실록』 24년 9월 14일)(『세종실록』 25년 2월 23일)(『세종실록』 26년 12월 15일)[『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연산군대에는 광평대군의 묘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호순신(胡純臣)』과 『장서(葬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상소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장서』를 단순히 지리서라 하면서, 장풍득수의 내용을 직접 그 전거로 활용하고 있다(『연산군일기』 1년 1월 10일).
조선조의 지관 선발 고시과목은 조선전기에는 『청오경(靑烏經)』·『장서』·『지리신법(地理新法)』·『명산론(明山論)』·『지리문정(地理門庭)』·『감룡경(撼龍經)』·『착맥부(捉脈賦)』·『의룡경(疑龍經)』·『동림조담(洞林照膽)』 등 아홉 개 과목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탁옥부(琢玉斧)』가 추가된다. 이 가운데 『청오경』·『장서』·『명산론』·『지리신법』은 조선조 지관 선발고시 4대 과목이라 할 만큼 중시되었다.
변천
지리서가 저술된 역사는 유구한데,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한대(漢代)에 이미 『궁택지형(宮宅地形)』이라는 문헌이 있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7세기 초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일본에 천문지리서를 전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리서가 저술되었고 이에 따라 지나치게 남발하는 폐단이 있을 정도여서, 당대(唐代)에 여재(呂才)가 이미 한 차례 크게 정리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의 내용에 『청오경』「계산지(啓山志)」의 풍수험응설(風水驗應說)에 따르면 조종조에서 이미 고려시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 지리에 관한 서적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는, 오직 『청오경』과 『장서』 등 10여 권의 책만을 남겨 관상감에서 학습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호순신』처럼 조선시대 과시과목이라 해도 그 진위를 의심하여 폐지할 것도 주장되었고, 풍수학인들에게 지리서를 두루 읽게 한 다음 오로지 정자(程子)·주자(朱子)·사마온공(司馬溫公)의 저서만 채택하자는 주장도 있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지리서는 그 내용에 대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유행한 지리서는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고려시대에 고려 풍수지리에 걸맞은 지리서가 유행한 단계, 제2단계는 조선이 건국되고 십학(十學)으로서 음양지리학이 채택되었을 당시에 채택된 지리서가 유행한 단계, 제3단계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서와 풍수사가 유행하던 단계, 제4단계는 해방 이후 외국에서 들어온 실용주의적 지리서가 유행하는 단계가 그것이다.
참고문헌
-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 『한서(漢書)』
- 김두규, 『풍수학 사전』, 비봉출판사, 2005.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주)한국학술정보, 2008.
- 이몽일, 『한국풍수사상사연구』, 일지사, 1991.
- 장성규·김혜정, 『완역 풍수경전』, 문예원, 2010.
- 장성규, 「『조선왕조실록』의 풍수지리문헌 연구-『청오경』·『금낭경』·『호수경』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王玉德, 『古代風水術註釋』, 北京師範大學出版社,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