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북(中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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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중북 |
한글표제 | 중북 |
한자표제 | 中北 |
상위어 | 북인(北人) |
관련어 | 골북(骨北), 대북(大北), 소북(小北), 육북(肉北), 청북(淸北), 탁북(濁北), 피북(皮北)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중북(中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1년 8월 10일, 『선조실록』 33년 1월 23일, 『광해군일기』 7년 1월 17일, 『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2월 30일 |
조선 선조대 후반 북인에서 갈라진 당파.
개설
중북은 중자(中子)로 표현되기도 하였으며(『인조실록』 11년 8월 10일), 북인(北人)의 분파인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중북은 학연이나 지연 등을 특성으로 하는 조선조 붕당의 모습이기보다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입장을 같이했던 세력들의 일시적인 정치적 분파이다. 유몽인(柳夢寅)·정창연(鄭昌衍) 등이 소속되었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는 소북이나 서인 등으로 정치적 변신을 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의 붕당은 선조 초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파되었는데 선조대 중반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등으로 동인이 수세에 몰렸다. 급기야 서인 정철(鄭澈)의 건저의(建儲議) 문제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임진왜란 중에 서인과 남인의 연립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의병 활동 등으로 정치 명분상 우위를 차지한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국을 주도하던 북인은 선조대 후반에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비롯해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과 새롭게 태어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지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대북을 비롯하여 소북·중북 등의 분파로 나뉘었다. 이 밖에도 북인은 골북(骨北)·육북(肉北)·피북(皮北) 등의 분파나(『선조실록』 33년 1월 23일) 청북(淸北)·탁북(濁北) 등의 분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유몽인(柳夢寅)을 비롯해 정창연(鄭昌衍)·이명(李溟)·유만(柳灣)·유혁(柳湙) 등이 중북에 속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했던 정온(鄭蘊)을 지지한 문경호(文景虎)와 강익문(姜翼文)의 부자, 그리고 이대기(李大期) 등도 중북으로 분류되었다(『광해군일기』 7년 1월 17일). 이들은 광해군이 재위할 때 정치를 주도하던 대북 세력의 정인홍(鄭仁弘)이나 이이첨(李爾瞻) 등의 전횡을 견제하는 세력이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2월 30일).
변천
중북은 1621년경에는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에 대거 포진하는 등 권력의 한 축을 차지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이후 북인 중 대북 세력은 대거 실각하면서 형벌로 죽거나 귀양을 가서 남은 자가 없었다. 반면 중북을 비롯한 대부분의 북인은 소북에 붙거나 또는 서인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면서 분파의 이름이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야승(大東野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속잡록(續雜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