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竹林七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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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진시대에 죽림에 은거하여 청담을 일삼은 일곱 명의 은자.

개설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 초에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배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에서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멀리하고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노장 사상을 숭배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였다. 이들 중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뒤에 종회의 참소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완적은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산군이나 인조 때에 죽림칠현을 자처한 인물이 있었으나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죽림칠현을 체제를 부정하거나 괴담을 주고받는 옳지 못한 무리로 규정하였다. 예컨대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은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이 죽림칠현으로 이름하고 고담(高淡)·궤설(詭設)을 일삼고 있다고 국문하기를 청했다(『연산군일기』 4년 8월 16일). 이에 이미 죽은 남효온(南孝溫)과 멀리 유배된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 외에 조자지(趙自知), 이정은(李貞恩), 한경기(韓景琦), 우선언(禹善言), 이현손(李賢孫), 노섭(盧燮), 유방(柳房) 등을 잡아들였다(『연산군일기』 4년 8월 20일).

기묘사화 이후 남곤이 조광조 등의 사림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죽림칠현이 총명하고 빼어난 자질이 있었으나 당고의 화[黨錮之禍]에 걸릴까 걱정하여 예법을 도외시하고, 명교에서 벗어나 청허(淸虛)의 풍습을 이루게 되어 결국 진나라가 망했는데, 조광조 일파도 말은 원대하지만 행동은 달라서 궤격(詭激)한 풍습을 이루어, 자기와 뜻이 다르면 소인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자기를 칭찬하면 군자로 지목하여 결국 폐단이 일어나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중종실록』 15년 9월 30일).

인조 때에는 승문원 부정자유영(柳潁)이 두 차례나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자 사간원에서는 그를 탄핵하며, 유영이 술이나 마시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나라의 정치와 법에 대해서는 함부로 시비하면서 스스로 죽림칠현에 견주었다고 비난하였다(『인조실록』 6년 11월 26일).

참고문헌

  • 김시천, 「문명의 길, 반문명의 길 - 죽림칠현, ‘자연’에서 ‘본성’으로」, 『인물과 사상』, 인물과 사상사, 2010.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 정세근, 「죽림칠현의 정체와 그 비판」, 『동서철학연구』21, 한국동서철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