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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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정조가 왕세손 시절 존현각에서 생활하면서 작성한 일기.

개설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는 정조의 왕세손 시절의 일기인데, 세손 때의 정조가 주로 존현각에서 생활하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실제 도서는 전하지 않고 1777년(정조 1)에 간행된 『명의록(名義錄)』에 수록되어 전한다. 왕세손 시절 정조의 언동이나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을 주로 수록하였다. 영조 말 정조 초반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편찬/발간 경위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세손 시절에는 주로 경희궁 존현각에서 생활하였다. 왕세손 시절 정조는 존현각에서 조강(朝講)과 같은 서연(書筵)을 하였고(『영조실록』 38년 9월 5일), 영조 말년 대리청정을 할 때는 존현각을 평상시 신하들을 인접(引接)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영조실록』 51년 12월 8일). 이에 따라 신하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거나(『영조실록』 51년 12월 11일), 입대(入對)하는 등(『영조실록』 51년 12월 12일), (『영조실록』 51년 12월 22일) 존현각은 정무를 보는 주요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정조에게 존현각은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정조의 『존현각일기』에는 그의 왕세손 시절 당시의 언동과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정조실록』 9년 7월 30일), 현재로써는 일부만이 『명의록』에 부속되어 전한다.

정조는 즉위한 이후 영조 말부터 정조 초반까지 각종 역변(逆變)을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정치 의리를 확립하기 위해 『명의록』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명의록』 간행에 참고하도록 『존현각일기』를 찬집청(纂輯廳)에 내려주었다(『정조실록』 즉위년 11월 18일), (『정조실록』 즉위년 12월 26일). 『존현각일기』는 또한 1785년(정조 9)의 『일성록(日省錄)』 편찬의 기본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서지 사항

『존현각일기』는 별도의 도서로 전하지는 않고, 1777년에 간행된 『명의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명의록』에 수록된 「존현각일기」는 상·하로 나뉜다. ‘상’에는 1775년(영조 51) 2월 5일부터 같은 해 윤10월 19일까지, ‘하’에는 같은 해 11월 1일부터 1776년 2월 28일까지의 일이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명의록』에 수록된 『존현각일기』를 보면, 먼저 날짜를 기록한 뒤에 당일에 있었던 신하들의 입대 사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조가 지시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당일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1775년 2월 8일자 일기에는 존현각 마루에 익명서(匿名書)가 던져진 사실, 그리고 포도청에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월 11일자 일기에는 범인으로 김중득(金重得)과 하익룡(河翼龍)이 체포되었고,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익룡은 홍인한(洪麟漢)의 집안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정조는 이를 왕 영조에게 아뢰었고, 영조가 극률(極律)로 다스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홍인한이 계속 만류하자 결국 그 ‘위세가 두려워 거스르지 못하고’ 포도청에 내려 죄를 다스리게 하는 데 그쳤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고단한 정조의 심정을 그대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존현각일기』는 영조 말 정조 초 정조를 둘러싼 각종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심경을 정리한 일기라 하겠다.

참고문헌

  • 『명의록(明義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