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발(鄭撥)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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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발 |
한글표제 | 정발 |
한자표제 | 鄭撥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정주영 |
자 | 자고(子固) |
호 | 백운(白雲) |
시호 | 충장(忠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3년(명종 8) |
사망 | 1592년(선조 25) |
본관 | 경주(慶州)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34-1 |
증조부 | 정수덕(鄭守德) |
조부 | (양조부)정세호(鄭世豪) (생조부)정세현(鄭世賢) |
부 | 정명선(鄭明善) |
모_외조 |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 남궁 숙(南宮淑)의 딸 |
형제 | 정탁(鄭擢) |
처_장인 | 풍천 임씨(豊川任氏) : 임자운(任自雲)의 딸 →(자녀)1남 |
자녀 | (1자)정흔(鄭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발(鄭撥) |
총론
[1553년(명종 8)~1592년(선조 25) = 4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무신.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과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를 지냈다.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백운(白雲)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간성군수(杆城郡守)정명선(鄭明善)이고, 어머니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남궁 숙(南宮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돈녕도정(敦寧都正)정세현(鄭世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정수덕(鄭守德)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7년(선조 10) 궁마(弓馬)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정발묘갈명(鄭撥墓碣銘)』] 무과에 급제 한 후 선전관(宣傳官)에 선발되었고, 얼마 후에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북쪽 경계이던 함경도 종성(鍾城) 지역에 여진족이 침략하자 북정원수(北征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부임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그 뒤 거제현령(巨濟縣令)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무신으로서는 쉽지 않은 비변사(備邊司) 낭요(郎僚)가 되었으며, 이후 위원군수(渭原郡守)에 제수되었다.[『정발묘갈명』] 이어 1589년(선조 22) 선조는 유능한 무신들을 등용하기 위하여 불차채용(不次採用)하였는데, 이때 정발(鄭撥)은 강섬(姜暹)의 천거로 훈련원(訓鍊院)부정(副正)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2년 1월 21일] 이후 그는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을 거쳐 내승(內乘)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올랐고, 부산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이때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정발은 조공을 하러 오는 것이라 생각하여 왜군(倭軍)을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진성(釜山鎭城)에 도착하였더니 이미 왜군이 부산진(釜山鎭)에 도착한 상황이었다.[『선조실록』선조 25년 4월 13일, 선조 25년 8월 7일, 선조 26년 윤11월 14일,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권1] 이에 정발이 성문을 간신히 닫고 성에 들어간 후 조선군과 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는 군민들과 함께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던 가운데 왜군의 탄환에 맞고 종일 목이 매어 있다가 살해당하였으며, 결국 부산진성도 함락되고 말았다.[『선조실록』선조 25년 4월 13일, 선조 25년 8월 7일, 『국조보감(國朝寶鑑)』 권31, 『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어 그가 죽자 그의 애첩 애향(愛香)도 갖고 있던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으며, 애향의 여종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재조번방지』 권1] 당시 부산진성에 있던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는데, 그의 애마가 투구와 의관을 물고 집으로 온 덕분에 현재 그의 묘소에는 이것들이 안장되어 있다. 한편 그는 검은 옷을 즐겨 입어 흑의 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품과 일화
정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채가 우람하고 단정하여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글을 읽었다. 그 순절(殉節)한 일이 다만 하루아침에 강개한 심정이 북받치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함양해 온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전한다.[『정발묘갈명』]
1592년 부산진첨절제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진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기 직전 화살이 바닥났다. 이에 어느 비장(裨將) 한 사람이 그를 잡아당기면서 달아나도록 청하자, 그가 웃으며 “남아(男兒)는 오직 한번 죽을 따름이다. 감히 다시 도망하라는 말을 꺼내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목을 베겠다고 명령을 하달하라.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되겠으니,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에 사졸들이 모두 울었으며, 이후 그 자리를 떠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전해진다.[『정발묘갈명』]
묘소와 후손
정발의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 있는데, 묘는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 합장으로 되어 있다. 원래 묘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묘표가 있었으나, 현재 서 있는 묘비는 1982년에 건립한 것이다. 묘소 아래는 4기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묘소 입구에 충노용월사적비(忠奴龍月事蹟碑)와 양경공묘소사적비(良景公墓所事蹟碑)가 있다. 또한 정발의 투구와 의관을 수습해왔던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과 그의 애첩 애향을 기리는 열첩정려애향사적비(烈妾旌閭愛香事蹟碑)도 함께 세워져 있다. 그의 묘는 1979년 경기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정발은 1681년(숙종 7)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1686년(숙종 12)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7년 1월 29일, 숙종 12년 12월 21일] 이런 가운데 1683년(숙종 9)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를 따라 숙종은 애향의 절의를 높이 사서 정려(旌閭)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발의 후손들을 등용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1월 28일] 이어 1713년(숙종 39) 임진왜란 때 세상을 떠난 동래부사(東萊府使)송상현(宋象賢)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에 정발 등도 함께 배향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숙종 39년 12월 2일]
부인 풍천 임씨는 임자운(任自雲)의 딸로 1남을 낳았는데, 아들 정흔(鄭昕)은 전라수사(全羅水使)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