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磚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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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내부 바닥에 까는 전을 만드는 장인이나 정전(正殿) 마당의 바닥 등에 까는 박석(薄石)을 떠내는 장인을 말함.

개설

전(磚)이라는 한자어는 벽돌을 말한다. 따라서 전장(磚匠)은 벽돌을 만드는 장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상 건축 재료로 벽돌을 사용한 사례는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백제시대 무령왕릉, 신라의 전탑에서 벽돌을 사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대부분 벽돌을 사용했다고 하면 바닥의 포장재로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고려중기 이후 생활 방식이 입식에서 좌식으로 변하면서 전을 바닥 포장재로 사용하는 것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조선시대 들어서 바닥에 전을 사용한 경우는 궁궐의 정전, 사묘 등과 같이 제한된 건축물에 한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건축 자재로서의 전은 극히 제한된 수요만 있을 뿐이었고, 사용된 전의 대부분은 와서(瓦署)에서 기와와 함께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앞서 두 기록은 모두 전장이 와서가 아니라 선공감(繕工監)에 소속된 장인으로 기록되어 이채롭다. 또 『경국대전』에 따르면 와서에는 40명의 와장의 소속되어 있는데 반해 선공감에는 20명의 전장이 소속되어 있다. 와장과 비교해보면 재료의 수요에 비해 너무나 많은 수의 전장이 선공감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 연구가 필요하다.

담당직무

『조선왕조실록』에 전장은 단 한차례 등장한다. 선공감의 장인을 논하는 데 다른 장인과 더불어 전장의 수를 30명으로 정하는 내용이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전장은 성종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등장한다. 『경국대전』 「공전」 ‘공장’조에 따르면 선공감에 전장 20명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磚)이라는 글자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광해군일기』 8년 8월 20일자 기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이라는 글자가 단독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전석(磚石)’이라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벽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영건의궤(營建儀軌)』를 비롯한 문헌을 참고한 결과 이것은 벽돌이 아니라 ‘박석(薄石)’을 표기하면서 한자를 ‘전석’으로 기록한 것들이었다. 결국 ‘전석’과 ‘박석’은 모두 박석을 지칭하는 것이다. 박석은 궁궐 정전 마당, 월대, 사묘의 신도, 능침 등 여러 곳에 사용되었고, 방의 구들장 역시 이 돌을 사용했다. 박석은 대부분 강화도의 매도(煤島)와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전장이 박장(薄匠) 또는 박석장(薄石匠)을 지칭하는 용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다른 문헌에서 박석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석수(石手)들이 박석을 떠내고 운반하고 시공하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변천

조선시대에 벽돌을 굽는 일을 담당하는 장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 화성의 영건 내용을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 벽장(甓匠), 와벽장(瓦甓匠)이 등장한다. 벽장은 한 차례 등장하며 대부분 와벽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들이 벽돌뿐만 아니라 기와도 굽는 장인들이기 때문이다. 화성영건은 다른 건축 공사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벽돌을 건축 재료로 사용했다. 이런 까닭에 서봉동(棲鳳洞)에 따로 벽돌 굽는 가마를 만들고 이곳에서 벽돌을 구워 공사에 사용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경기문화재단 편집부,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 경기문화재단, 2007.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동녘,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