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도(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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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지을 때 그 글에 반드시 유가의 도를 실어야 한다는 명제.

개설

조선시대의 문인과 학사들은 육경(六經)과 같은 재도지문(載道之文), 즉 ‘도를 담은 문장’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왕 또한 경연 등에서 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각 시대의 벼슬아치들은 늘 왕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책과 도에 대해 말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무너진 정치를 바로 세우는 길임을 강조하였다(『인조실록』 26년 1월 28일). 재도지문이 문학뿐 아니라 정치의 기본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재도지문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통칭하는 재도론(載道論)은 문장을 성인의 도를 전하거나 밝히는 수단으로 인식하여 도를 근본으로, 문장을 말단으로 보는 도본문말(道本文末)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문과 도의 관계 설정에 따라, 문으로 도를 전한다는 문이재도(文以載道), 문으로 도를 밝힌다는 문이명도(文以明道), 문으로 도를 관통한다는 문이관도(文以貫道), 문을 통해 도를 배운다는 유문학도(由文學道), 문을 통해 도를 본다는 인문견도(因文見道), 글을 지어 도를 해친다는 작문해도(作文害道), 문이 도를 통해 나온다는 문종도출(文從道出) 등으로 분화 발전하였다.

내용 및 특징

재도론은 송나라 때의 유학자들에 의해 이론적 틀이 확립되었다. ‘문이재도’라는 말은 주돈이가 한 말이다. 그는 "문은 도를 실어 나르는 것이다. 수레의 바퀴를 아름답게 꾸며도 사람이 쓰지 않는다면 한갓 꾸밈일 뿐이다."라고 하여, 도를 중하게 여기고 문을 가볍게 여기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도와 무관한 문을 빈 수레에 비유하고 표현의 화려함을 수레의 겉치장에 견주어, 문은 다만 도의 도구일 뿐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주돈이의 재도론은 정자와 주자를 거치면서 더욱 극단화되어, 문을 짓는 것은 도를 해치는 것이라는 ‘작문해도설’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문장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긍정했던 명도론(明道論)과 관도론(貫道論)은 고문가에 의해 제 꼴을 갖추게 되었다. ‘문이명도’는 유종원이 한 말이다. 그는 "어려서는 문장을 할 때 문사에 힘썼는데, 커서는 문이 도를 밝히는 것임을 알았다."고 하여, 문을 통해 도를 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이관도’는 한유의 문인 이한(李漢)이 「창려선생집서(昌黎先生集序)」에서 "문이란 도를 꿰는 그릇이다. 이 도에 깊지 않으면서 이름이 있는 자는 없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관도는 문과 도가 합쳐져 하나가 됨을 말하지만, 재도는 도를 싣는 그릇으로 문을 이해한다. 관도가 도를 밝힌 이후에 문을 하는 것이라면, 재도는 도를 밝히기 위해 문을 한다. 관도는 도와 문을 본질과 작용의 상관속(相關束)으로 이해하지만, 재도는 문은 반드시 도와 관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관도는 도를 중히 여기면서도 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데 반해, 재도는 도를 중히 여기고 문을 가볍게 여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변천

조선시대의 도학가와 고문가들은 재도와 관도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였는데, 여기에서 분화된 논의들은 중국에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재도론은 정도전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된 이후, 도학가들에 의해 일관되게 주장되었다. 그들은 "문과 도는 별개이다. 문이 언제나 도와 연관을 갖지는 않는다."며 ‘도본문말’의 인식을 유지하였다. 그에 비해 관도론은 문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문장가들에 의해 확대 발전되었다. 그들은 "문은 도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문과 도는 두 가지가 아니며 문이 곧 도이다."라고 하여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지향하였다. 17세기 말 고문의 대가로 알려진 김창협의 한구정맥론(韓歐正脈論)은 도문일치의 문제를 잘 대변한다. 한구정맥론은 ‘주자의 도와 한유·구양수의 문장’을 통합하려는 목적 아래 탄생한 이론이다.

그런데 도와 문장 사이의 길항 작용은, 18세기 초에 조구명과 유한준에 의해 도와 문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도문분리(道文分離)가 주장되면서 문의 가치가 더욱 긍정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소품문(小品文)이 등장하면서, 문은 더 이상 도에 종속되거나 도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상대적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진정(眞情)으로 세계의 진경(眞景)을 노래하는 새로운 대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죽은 아내를 위해 한없이 눈물을 흘려 정의 과잉을 보여 준 심노숭과, 도회지의 시정 풍경을 통속적으로 그려 낸 이옥 같은 작가들이 대거 탄생한 것도 이때이다. 소품의 세계를 지향한 모든 작가들은 재도와 관도 등 도문 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창작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소품문이 쇠퇴하고, 고문이 다시 문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홍석주과 김매순을 중심으로 고문이 새롭게 부활하면서, 재도와 관도를 중심으로 한 기왕의 논의들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여 다기한 고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 고려대학교출판부, 1998.
  • 정민, 『조선 후기 고문론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9.
  • 강명관, 「정도전의 재도론 연구」, 『한문학논집』10, 1992.
  • 박경남, 「유한준(兪漢雋)·박윤원(朴胤源)의 도문분리 논쟁과 유한준(兪漢雋)의 각도기도론(各道其道論)」, 『한국한문학연구』42, 2008.
  • 이홍식, 「동계 조구명의 주의론적 글쓰기와 기의 미학」,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