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도감(掌樂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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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때 왕 환궁 시 교방가요를 연행할 수 있도록 설치한 임시 기구.

개설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연향을 베풀 때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했다. 광해군 때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흩어진 악공과 기녀[女妓]들을 다시 모으고, 침체한 궁중 연향악을 새로 연행하는 일이 많았다. 장악도감은 왕의 환궁 등의 행사를 맡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악도감은 1615년(광해군 7) 부묘(祔廟)한 뒤 왕이 환궁할 때 교방가요를 올리기 위해 장악원의 요청으로 설치되었다. 교방가요는 ‘기녀가 왕에게 가요의 축(軸)을 올린다.’ 하는 뜻인 교방헌가요(敎坊獻歌謠)의 준말이다. 교방가요를 할 때는 침향산(沈香山)을 설치하고 기녀들이 학춤[鶴舞]과 연화대(蓮花臺) 등을 추며 가요가 적힌 축(軸)을 바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교방가요는 흔히 하는 것이 아니어서 당시 침향산 등 교방가요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해 본 장인이 없었다. 이에 침향산의 복원 제작 등 고려가요 연행 추진을 위한 임시 특별 기구로 장악도감을 설치했다. 침향산은 나무판자로 된 산 모양의 구조물로 산 앞에 연못과 연화통(蓮花筒), 난간을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궁 밖의 거리에서 사용한 것으로 향산(香山), 산차(山車)라고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장악도감은 관원과 장악원 소속의 악공, 장인(匠人) 등으로 조직되었다. 교방가요를 올리기 위해 필요한 도구, 악공의 복식을 각 관청의 협조를 얻어 제작했다. 연행을 위한 연습 등에도 관여하였다.

변천

장악도감은 1615년 왕의 부묘 후 환궁을 위한 교방가요를 위해 설치되었다. 이후, 다음 해인 1616년 왕이 알성(謁聖)을 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도 각 관청에 협조를 요청하여 교방가요를 공연했다. 다음 해인 1617년에는 명에서 면복(冕服) 즉 면류관과 곤룡포를 받자 종묘에 고하고[告廟]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낸[親祭] 뒤 환궁할 때의 교방가요를 위해 다시 장악도감이 활용되었다. 교방가요를 공연할 때마다 침향산은 보수하여 사용했다. 침향산은 제작하는 데 많은 물자가 필요하여 국고 낭비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 이후에는 장악도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이혜구,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