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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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개설

보통 비녀라고 부르며, 이를 계(笄)·채(釵)라고도 한다. 모양은 대개 한쪽 끝이 뭉뚝하여 빠지지 않게 되어 있으며, 그 부분에 여러 가지 장식이 있다. 비녀[簪]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른다. 머리의 형태에 따라 사용되는 비녀는 종류가 다양하며, 이는 평상용과 예장용으로 구분된다. 비녀는 머리를 고정시키고 정돈해 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뒷머리를 장식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남자는 관모에 따라 비녀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비녀의 사용은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한 청동비녀와 뼈비녀, 부여에서 발견된 백제의 은비녀, 삼국시대의 장식적인 금비녀·은비녀가 발굴됨으로써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삼국시대에는 더욱 장식적인 금비녀·은비녀가 발굴되었으며, 외가닥으로 된 것과 두 가닥·세 가닥으로 된 것이 있는데, 두 가닥으로 된 것이 많다. 특히 백제무령왕릉에서 나온 금비녀는 왕비의 것으로 비녀 머리는 살구나무 잎의 형태로 꾸몄고, 거기에 넝쿨·꽃·구슬무늬 등을 장식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다양한 비녀가 있었으며, 고려에 온 다른 나라 사신들도 고려에서는 “부인의 머리는 귀천에 관계없이 같았으며, 머리채를 오른쪽 어깨로 넘겨 아래로 드리웠는데 붉은 나(羅)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쪽진 머리가 널리 유행하면서 재료와 형태에 따른 비녀의 명칭이 생겨났다. 비녀는 금·은·진주·비취·산호 등의 값비싼 보석류로 만든 것과 나무·뿔·백동·놋쇠 등과 같은 서민적인 재료로 만든 것이 있다.

형태

비녀의 크기에 따라 큰 비녀와 작은 비녀로 구분된다. 큰 비녀의 머리에는 봉황용 등을 형상하였다. 비녀 머리에는 동물이나 식물의 모양을 장식하여 이름을 붙였다. 봉잠(鳳簪)·용잠(龍簪)·매조잠(梅鳥簪)·죽절잠(竹節簪)·연봉잠(連峰簪)·모란잠(牧丹簪)·석류잠(石榴簪)·화엽잠(花葉簪) 등이 그것이다. 그 형태가 대부분 길상적(吉祥的)인 것으로 부귀(富貴)·장수(長壽)·다남(多男) 등을 기원하는 것들이다.

용도

큰 비녀는 주로 예복용으로, 작은 비녀는 일상용으로 쓰였다. 봉잠·용잠은 왕비나 세자빈이 예장할 때 다리[月子]를 드린 큰 족에 꽂았다. 일반 부녀자는 혼례 때 봉잠을 사용하였다. 가채 또는 족두리·떠구지 등에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닥 비녀[釵]를 사용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면류관에 꽂는 옥잠(玉簪) 또는 금잠(金簪), 백관의 양관에 꽂는 각잠(角簪) 등이 있다. 각잠은 목잠(木簪)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비녀는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으면서 용도에 따라 의복에 재료와 모양을 달리하여 착용했다.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김씨가 쓴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自藏要覽)』에 “비녀도 계절에 맞추어 직금(織金) 당의(唐衣)에는 봉잠이나 옥모란잠을 꽂고, 평시 문안에는 10월 1일부터 용잠, 2월에는 모란잠, 4월·8월·9월에는 매죽잠도 좋고 옥모란잠도 꽂는다. (중략) 춘추에는 모란잠·매죽잠을 꽂으면서 이사떨잠을 꽂아 수식한다.”라고 되어 있어 겨울에는 은비녀나 금비녀를, 여름에는 옥비녀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녀의 자체 재료 및 장식 면에서 높고, 얕고, 좋고, 그르고,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방식은 궁중이나 일반인이 모두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숙 편저,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 유희경,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