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장(入絲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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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입사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

개설

입사장(入絲匠)은 청동이나 철, 백동으로 만든 기물의 표면에 홈을 파고 여기에 금사나 은사, 동사로 문양을 새겨 넣는 장인이다. 중국에서는 한대 이후 거의 하지 않다가 청대에 다시 출현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더욱 발전시켰고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도 계승되어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8호 입사장으로 지정되었다. 입사장은 주로 은사로 문양을 상감하여서 유물의 명칭도 철제은상감환두대도, 청동은입사정병, 철제은입사여의, 백동은입사화로 등으로 부른다. 그들이 은실박이 한 기물들의 종류는 왕실 및 관아에서 쓰는 향로나 의례용품·무구류(武具類), 일반인들이 쓰는 연초함과 필통, 불교 의식에 사용된 향완과 향합·정병 같은 공양구로 나누어진다.

기법의 특징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동 바탕에 조각정으로 골을 파내어 금·은선을 박아 넣는 끼움입사 방법을 쓴 것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철 표면을 마치 포목의 결처럼 조각정으로 곱게 쪼이질을 한 다음에 그 위에 금·은사나 은편(銀片), 동선을 넣는 쪼음입사 방법으로 문양을 상감하는 새로운 기법을 발전시켰다. 철 외에 백동에도 응용되었으며, 동에 금을 약간 섞어 만든 오동(烏銅)을 이용한 입사기법도 성행하였다.

담당 직무

입사장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관장 체계에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삼국시대 위세품(威勢品)인 환두대도나 고려시대 마구류 등은 관장이 만들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입사장들은 사인검(四寅劍)이나 삼인검(三寅劍) 같은 도검류, 투구 및 지휘봉·몽둥이 같은 무구류, 향로나 촛대·호갑(護匣)·자물쇠·여의 등 의례 및 왕실 생활에 필요한 기물에 각종 길상 문양을 은입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예컨대 1616년에 추숭도감이 양전(兩殿)의 책보(冊寶) 호갑을 준비하는 중 옛 전례에 의거하여 마땅히 입사 장식을 사용해야 하지만 입사장수(入絲匠手)는 한 사람밖에 없고, 서울에도 전무하여 지방의 장인들을 수소문하여 데려오고 있다고 아뢰는 사실을 볼 때 호갑의 장식은 반드시 입사했음을 전해주고 있다(『광해군일기』 8년 8월 5일). 무구류에 대해서는 정조 때, 대내에 비축용 군물(軍物)과 기용(器用) 중 신축년조(辛丑年條)를 별고(別庫)에 저장하고 장문(狀聞)하라는 내용 중 궁시대(弓矢袋)인 흑서피은입사통개(黑黍皮銀入絲筒箇) 40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입사장들이 구사한 쪼음입사 기법은 철소지에 기물을 감탕에 고정시키는 과정·표면을 쪼아 포목처럼 만들고 문양을 그리는 과정·은선으로 문양을 메꾸는 과정·광내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입사할 기물을 고정시키는 감탕은 송진과 황토를 1대 1의 비율로 배합한 후 들기름을 섞은 것이다. 기물 표면에 정을 대고 소형 망치인 중도리로 두드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표면을 수직으로 친 후 사선으로 치고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모양과 90˚가 되게 쳐서 표면에 정교한 요철(凹凸)을 만든다. 그 위에 뾰족한 정과 도레로 문양을 그린 후 은선을 망치로 두드리면서 밀착시킨 다음 끓는 물에 잿물을 넣고 기물을 담가 감탕을 분리한다. 갈기로 표면의 불필요한 은선들을 끊어내고 광쇠로 마무리해서 완성한다.

변천

현존하는 유물을 참고하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입사 기법이 매우 발달하였고 그 중심에는 분명히 관장으로서 입사장의 역할 및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지만 고려시대 금속기명을 담당하는 장야서에도 은장, 백동장, 적동장은 분류되어 있음에 비해 입사장은 따로 두지 않았다. 1469년에 상정소(詳定所)의 계(啓)에 따라 반상가와 서민 모두의 금·은입사로 된 마장(馬粧)을 금지한 기록을 보면 금·은입사로 장식된 말안장의 보편적인 사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국에 입사장이 꽤 많았음을 시사해준다(『예종실록』 1년 7월 9일). 입사장은 조선초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처음 등장하는데, 경공장으로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소속되어 있을 뿐 외공장은 두지 않았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배치되었으므로 입사장의 인원수는 변화가 없지만 실제로 조선후기 각종 의궤에 보이는 입사장들은 훈련도감, 금위영, 수어청 등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장적(帳籍)을 만들어 소속 관청에서 보존했고, 나이 60이 되어야 비로소 신역이 면제되었다.

조선후기 의궤에 보이는 입사장으로는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김용수(金龍守)나 안응천(安應天), 17세기 중엽에 20년간 관장이었던 안선일(安善一)을 들 수 있다. 18세기 전반의 의궤에는 입사장의 이름 뒤에 훈국(訓局)·상방(尙方)·금위영(禁衛營)·수어(守禦)·사(私) 등 소속 관청과 사장임을 표기해놓아 특별한 의례가 있을 때 여러 곳에서 차출되어 공동 작업 했음을 시사해준다. 예를 들어 숙종·경종 연간에 활동한 표정길(表廷吉)은 훈련도감 소속이었고, 1721년∼1736년에 활동한 정유성(鄭有成)은 금위영 소속, 1721년∼1730년에 활동한 김춘봉(金春奉)은 상의원 소속 입사장이었다. 이들은 각자 소속 관청에 관련된 전문적인 기물에 입사를 했을 것이다. 『왕세자가례시도청의궤(王世子嘉禮時都廳儀軌)』에 기록된 이수강(李壽江)과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에 보이는 이언묵(李彦墨), 『의소세손수책시책례도감의궤(懿昭世孫受冊時冊禮都監儀軌)』에 보이는 유기한(柳起漢)은 18세기 중엽에 활동한 입사장이었고, 『문효세자수책시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受冊時冊禮都監儀軌)』에 기록된 유성대(劉聖大)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대표적인 입사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입사장으로는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활동한 이행원(李行源)·이학응(李鶴應), 의정부의 한창수(韓昌洙), 울산 병영에서 은동삼구리를 잘 만들었던 박선약과 그의 문하생 이장호(李章鎬)를 들 수 있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사장』, 민속원, 2008.
  • 문화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精華:入絲工藝』, 문화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1997.
  • 김종태,『韓國手工藝美術』, 예경산업사, 1990.
  • 삼성문화재단 편, 『大高麗國寶展』, 삼성문화재단, 1995.
  • 예용해, 『人間文化財』, 어문각, 1963.
  • 황수영, 「高麗靑銅銀入絲香垸의 硏究」, 『佛敎學報』 1,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