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본(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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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상의 원래 전곡 액수를 채워 넣는 것.

개설

입본이란 정부의 허락을 받고 국가의 돈·베·곡물 등 물자의 사용을 허가받은 뒤에 이것을 요령껏 운영하여 이익을 남기고, 본래의 액수를 채워 넣는 것을 말하였다(『영조실록』 8년 5월 29일). 흉년이 들어 진휼의 재원이 필요할 때나 지방의 산성(山城) 수리 비용이 필요할 때에도 이러한 입본을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숙종실록』 43년 12월 25일). 즉, 입본은 지방 재정이 부족할 때 식리(殖利) 활동을 통하여 재원을 보충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용한 것이었다. 정부의 허가를 얻으면 불법이 아니지만, 허가를 받지 않고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창고의 물자를 활용하면 불법으로 처벌받았다. 18세기 후반의 환곡 운영에서도 지방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입본을 시행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왕조의 재정이 부족했던 17세기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강화도나 남한산성에 비축된 은이나 면포를 빌려주고 진자(賑資)로 활용하게 하였다. 무상으로 각 고을에 지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고을에서 이를 자본으로 활용하여 요령껏 이익을 남기고, 다음 해에는 상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입본은 불법이 아니었고, 정부에서도 재정 보용에 적절히 활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에 산성의 비축곡으로 입본하고 그 이익으로 수리 비용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각 지역의 감사나 병사 등도 비축된 물자를 가지고 입본하여 이익을 남겼고, 그런 이익은 진휼 재원으로 쓰이거나, 지방 재정으로 충당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본 활동을 통하여 감사나 병사 등은 많은 자비곡(自備穀)을 확보하였다. 자비곡은 각 지방의 수령이 지방 재정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비축해 놓은 곡식을 말하였다.

환곡 운영에서 지역 간의 곡물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곡물이 많은 곳에서 곡물이 적은 곳으로 곡물을 옮기는 이무(移貿)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반상의 편의를 위하여 곡물 대신 돈으로 바꾸어 옮기는 이무작전(移貿作錢)이 시행되었다. 이무작전이 한 번 시행된 이후 각 아문에서는 지역적·계절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곡식을 운반하여 이익을 남기고 본전을 충당하는 이무입본(移貿立本)을 시행하였다. 봄에 곡물 대신 돈을 분급하고 가을에 곡물로 받아들여 이익을 남기는 전환입본(錢還立本)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전환입본은 봄에 곡식이 귀하여 쌀값이 뛰면 창고에 남겨 둔 곡식을 1석당 10냥에 팔고는, 다시 2냥씩을 민간에 나누어 주고 가을에 1섬씩 바치도록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었다. 또한 정부의 허가 없이 곡식을 판매하여 이익을 남기고 원곡을 채워 넣는 발매입본(發賣立本)이 시행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8년 1월 7일). 이런 여러 형태의 입본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났다.

변천

입본의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환곡을 돈으로 분급하는 ‘전환’은 환곡 운영상의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현물의 분급과 수납을 기본으로 하던 환곡 운영이 화폐를 매개로 분급과 수납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본래 입본은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하여 본전을 유지하면서 추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지방에 허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역적·계절적 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식리(殖利)하는 방식은 지방 재정 확보나 지방관이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 장명희,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환곡 운영의 변화: 이무입본(移貿立本)과 모조(耗條) 금납화의 성립 배경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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