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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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2년(세종 4)~1465년(세조 11) = 44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8왕자. 봉작(封爵)은 익녕군(益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머니 안숙빈(安淑嬪安氏)는 숙선옹주(淑善翁主), 안선빈(安善嬪)이라고도 하는데, 안의(安義)의 딸이다. 혜령군(惠寧君)이지(李祉)의 동복아우이고,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의 고조부이다. 부인 운봉 박씨(雲峯朴氏)는 절제사(節制使) 박종지(朴從智)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았다.

왕자의 예우

1422년(세종 4) 태종이 돌아가던 해에 태어난 막내아들이므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1429년(세종 11) 9월 나이 8세 때 익녕군에 봉해졌고, 1430년(세종 12) 12월 세종이 형제들과 아들들을 봉군할 때 익녕군이 되었다. 1431년(세종 13) 나이 10세 때 종학(宗學)에서 장난만 치고 공부를 게을리 한다고 하여 종부시에서 벌을 주자고 아뢰었다. 1434년(세종 16) 나이 13세 때 판사(判事)박종지의 딸 운봉 박씨와 혼인하였다. 1438년(세종 21) 나이 17세 때 단오 석척희(石擲戱) 곧 편을 갈라서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돌을 함부로 던지다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그 중에서 사망한 자가 나오자, 원평(原平)으로 유배되었다. 1449년(세종 31) 익녕군이치는 자기집 종 계동(桂洞)이 자기가 관계하는 계집종과 간통하였다고 하여 사사로이 장을 때려서 죽게 만들었다. 이 일로 인하여 충청도 제천(堤川)에 유배되었는데, 사간원에서는 하삼도(下三道)의 극변(極邊)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세종이 그의 노모를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 이때 회수되었던 관작은 1451년(문종 1) 그에게 돌려주었다.

1452년(단종 즉위)에 단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종친을 인견하였을 때 하사품을 받았다. 그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 세조가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을 비롯해 4공신과 종친을 불러 연희를 베풀었는데, 이 연회에 참석하였고,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의 저택에서 개최된 연희에도 참석했다. 세조가 왕위에 등극하던 1455년(세조 1)에 베푼 잔치에도 다른 종친들과 함께 입시(入侍)했다. 익녕군이치는 세조의 연회에 자주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였던 것 같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강(昭剛)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 별라산(別羅山)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이다.

부인 운봉 박씨는 박종지(朴從智)의 딸인데, 1녀를 두었다. 1녀 이미중(李眉重)은 김신(金信)의 처가 되었는데, 김신은 근녕군(謹寧君)이농(李禯)의 사위인 김희(金僖)의 동생이다. 측실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조철산(趙鐵山)의 딸이다. 서출은 2남 3녀이다. 아들들은 비록 측실 소생이지만, 그 어머니가 양인(良人)이기 때문에 정실 아들의 대우를 받았다. 1자 의천부정(義泉副正) 이승은(李承恩)은 이치의 후사로 습군(襲君)하여 의천군(義泉君)이 되었다. 2자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도 수천군(秀泉君)이 되었다. 1녀는 원근례(元謹禮)의 처가 되었고, 2녀는 박정(朴禎)의 처, 3녀는 정지아(鄭之雅)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미수기서(眉叟記書)』
  • 『포저집(浦渚集)』
  • 『오리선생문집(梧里先生文集)』
  • 『창석집(蒼石集)』
  • 『용주유고(龍州遺稿)』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