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里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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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면리 체제에서 리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이임(里任).

개설

이정(里正)은 조선시대 군현의 하부인 면리 체제에서 리 단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자이다(『태종실록』 15년 5월 6일). 『경국대전』「호전(戶典)」호적조(戶籍條)에는 "서울이나 지방에는 모두 5호(戶)를 1통(統)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를 둔다. 지방은 5통마다 이정(里正)을 두고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면에는 권농관 외에도 감고(監考)가 있었고, 리에는 이정 아래에 방별감(方別監)이 있었다. 방별감은 관문(官門)을 왕래하면서 이정을 도와 잡무를 맡아 보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면리 체제는 군현제가 정비되고 그 하부 조직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방위면(方位面) 체제에서는 면·리·촌이 혼용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속현(屬縣)·속군(屬郡)을 비롯하여 향·소·부곡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면리제는 체계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면리제의 체계는 조선후기에 들어서 갖추어졌다. 고유명을 갖는 면이 조직화되고 수령-면임-이임으로 이어지는 상하 체계가 정립되며, 이정은 면임과 통수의 중간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면리제 조직의 체계화는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제고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정부는 중앙의 정령(政令)을 촌락 사회에까지 관철시키고, 아울러 촌락 사회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앙 정부의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리 단위에 행정 실무자로서 이정을 두었다.

내용

리 단위의 이정과 방별감, 면 단위의 권농관과 감고 등은 매 5일마다 관아에 출입하여 촌락 행정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 16년 9월 15일). 당초에는 이들이 함께 출입하다가 후에는 이들이 윤번제로 한 사람씩 관아에 출입하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정을 비롯한 이임과 면임들은 첫째, 권농관과 함께 진황(陳荒)의 발생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해 제언(堤堰)을 수리·관리하고, 농사의 실태를 조사하는 일을 이행하였다. 둘째, 수령의 지시 사항을 면리 내 농민들에게 전달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는 직무를 수행하였고, 셋째로는 관내의 중요 사항을 수령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가졌다. 인구의 동태, 생산관계나 추수, 인구의 이동, 출생과 사망, 신개간지(新開墾地), 전재상전(全災傷田), 재전(災田) 및 진황전(陳荒田) 등의 현황을 파악하여 정기적으로 보고하였다(『태종실록』 8년 11월 23일). 넷째, 정부의 대민 관계와 농민의 대정부 관계의 일로 환곡(還穀) 처리, 역(役)·군포(軍布)의 징수, 사송(詞訟) 문제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변천

『경국대전』에서 면에는 권농관, 리에는 이정, 통에는 통주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내(任內)라는 행정 구역이 혁파되면서 임내리(任內吏)는 대개 권농관으로 대치되고, 촌장·촌정은 이장과 이정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면리임(面里任)의 명칭은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17·18세기에는 리의 이정은 이감(里監)·유사(有司)로, 면(面)의 권농관과 감고는 풍헌(風憲)과 부헌(副憲)으로 불리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또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홍양호(洪良浩)의『목민대방(牧民大方)』에서는 통수(統首)·패장(稗長)·이감(里監)·이정이라는 직책이 파악된다. 5가(五家)를 1통으로 하고 매 통에는 통수를 두었고, 매 2통마다 패장을 두었다. 패장은 서민 중에서 문자를 터득한 자로 임명하여 패 내부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리에는 이감 1명을 두었는데, 이감은 향품(鄕品) 또는 중서(中庶) 중에서 문자를 잘 아는 자로 임명하고 권농과 유사를 겸하면서 관내의 문보(文報)·풍화(風化)·금령(禁令)·권농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또 리에는 이정 1명을 두었는데, 이정은 서민 중에서 근실하고 일을 잘 아는 자로 임명하였으며 관내의 검납(檢納)·차역(差役)·추착(推捉) 등의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이로서 리에는 이정을 비롯하여 이임·유사·이감 등의 명칭이 파악되며, 면에는 권농관을 비롯하여 면임·감고·풍헌·부헌·존위 등이 파악된다. 이러한 명칭은 조선후기 향약의 시행이 향에서 면 단위로, 다시 면 단위에서 마을 단위로 확산되면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부세의 공동납이 시행되면서 이들의 역할이 세분화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 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 행정 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류승희, 「조선 후기 면리제의 성립과 권농관 및 이정의 역할」, 『전농사론』4,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