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염창(義鹽倉)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 충선왕대 소금 판매를 전담하던 관영 창고이자 조선초 염세를 관장하던 관서.

개설

의염창은 고려 충선왕대 소금 전매제도인 각염법을 시행한 후 이를 전담하기 위하여 설립한 창고로,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관제를 새로이 정비하는 과정에서 혁파되지 않고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394년(태조 3) 사재감(司宰監)에 그 업무가 이관되면서 곧바로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09년(고려 충선왕 원년)에 처음 설립되었다. 『고려사』에 보면,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소금세(鹽稅)는 예로부터 국가의 경비에 쓰던 것인데 지금 여러 궁원(宮院)과 사사(寺社), 그리고 세력 있는 집에서 모두 앞을 다투어 소금가마를 차지하고 그 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나라의 비용이 부족하니 해당 관청들에서는 끝까지 추궁·조사하여 그들의 월권행위를 없애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들의 소금가마를 모조리 환수하는 대신 의염창을 설치하여 소금을 사서 쓰게 하였다. 또 지방에는 소금을 만드는 집인 염호(鹽戶)를 두고, 염창을 관부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난 후 1392년(태조 원년) 관제개혁 당시 의염창은 혁파되지 않고 염세를 관리하는 관서로 유지되었다. 이에 고려시대 소금을 화매(和賣)하던 기능을 유지하는 한편 싼값에 소금을 판매함으로써 의창(義倉)의 진휼 업무를 보조하였다.

조직 및 역할

1392년 관제 정비 시 의염창의 관원으로 종7품의 승(丞) 2명과 종8품의 주부(注簿) 2명, 판관(判官) 4명, 사리(司吏) 2명을 두었다. 애초 의염창이 설립된 고려시대에는 봄·가을에 사회적 소외계층인 환과고독이 먼저 베 1필을 바치면 소금 20두를 주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진휼기능이 선초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의염창을 왕실의 사재감에 소속시키고 또 군염감(軍鹽監)에 이속시키는 과정에서 값을 올려 쌀 1두(斗)에 소금 5두로 화매하는 한편, 환과고독에게만 소금을 싼값에 분급하여 의염(義鹽)의 성격이 약화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세종실록』 28년 2월 8일).

변천

고려시대 의염창의 설치는 소금 전매제도인 각염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전기 의염창의 기능을 사재감에 이속시키면서 조선 정부는 지방의 염분(鹽盆)을 파악하고 이를 관리하기는 하였지만 소금을 전매하는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조선후기 들어 어염세를 전적으로 관리할 관서를 설립하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제기되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17세기부터 궁방과 아문에서 어전(漁箭)과 염분을 사적으로 탈취하여 절수하는 폐단이 야기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염분에 수세하는 제도를 정비하고 민간의 어염절수처를 조사하게 하는 등 어염세의 수취 관행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균역법 시행 이후에는 균역청의 공적 세입원으로 대거 흡수시켰다.

참고문헌

  •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2.
  • 이욱, 「朝鮮後期 魚鹽政策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