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군(留防軍)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유방군 |
한글표제 | 유방군 |
한자표제 | 留防軍 |
상위어 | 진관체제(鎭管體制) |
관련어 | 정병(正兵), 유방정병(留防正兵), 영진군(營鎭軍), 부방(赴防)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노영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방군(留防軍) |
조선초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교대로 부방(赴防)하여 복무하던 군사.
개설
조선초기 전국이 진관체제(鎭管體制)에 의해 파악되는 체계적인 국방조직이 갖추어졌으나 모든 지역에 군사가 주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방상 중요한 지점이 전국에 설정되어 있어서 군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대체로 1~4려(旅) 규모의 유방군들이 상주하였는데 유방군은 각 지역의 정병(正兵) 가운데 주요 지점에 교대로 부방하여 주둔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던 유방정병(留防正兵)으로서 4교대로 근무하였다. 다만 국방상 변경 지역인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우에는 정병 이외에 갑사(甲士)도 유방군으로서 함께 편성되었다. 영진군(營鎭軍)의 후신인 이들은 도성으로 번상하는 정병보다는 약간 뒤지는 존재였지만 1보(保)를 지급받는 양인 군사들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건국 직후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도내 병력을 장악하고 동원하도록 하였으나 상설적인 동원체제가 아니었으므로 외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남방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를 폐지하고 각 도마다 연해의 주요 지역에 2~4개의 진(鎭)을 설치하여 모두 15개소의 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진에 파견되는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인근 고을의 군사를 아울러 통솔하게 하였다. 이것이 진군(鎭軍)이다. 이어서 1398년(태조 7) 9월 도절제사가 복구되면서 도절제사영에 소속된 영군(營軍)도 설치되었는데 이후 이를 통합하면서 영진군으로 불렸다. 이들은 군관으로도 불렸는데, 대부분 마병(馬兵)으로 편성되어 상륙한 왜구 등을 저지하는 핵심 군사력이 되었다. 이 영진군은 최초 2번으로 나뉘어 1년에 6개월간 근무하다가 1426년(세종 8) 이후에는 4번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부방하도록 되었다.
세종대 중반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함경도와 평안도, 그리고 경기를 제외한 전국 5개도의 군사적 요충에 도별로 2~5개 처씩 모두 17개소의 진(鎭)이 설치되어 이곳에 영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영진은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이 세조대 진관체제가 형성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다만 세조대 진관체제가 형성되면서 영진군은 1462년(세조 8)에 정병으로 통합되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부방하여 근무하는 군사들을 유방군, 유방정병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다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북방의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 정병들은 당번 때에는 다른 진 등에 부방하고 하번 때에는 유방군으로서 자신의 고을에서 유방하였으므로 그 부담이 매우 무거웠다. 개성 지방의 유방군은 개성부의 순작(巡綽) 임무에 종사하였다. 유방 정병은 4번으로 하여 1개월씩 교대로 근무하였으며 이들에게는 2월에 도목(都目)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근무일수가 245일이 차면 관계(官階)를 더 주며 종5품 영직(影職)에서 거관(去官)하도록 하였다. 계속 근무하는 자는 135일까지 더하며 정3품에서 그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의 국방체제는 16세기 들어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줄어들고 양인층의 군역 기피 등으로 인하여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군역 부담도 이전의 번상 시위나 유방과 같은 것에서 잡역 동원으로의 전환과 대립(代立), 방군수포(放軍收布)의 경향의 성행으로 군역이 각 관청이나 지방 진영(鎭營) 등의 주요 수세원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유방군에 의한 평시 방어체제가 상당히 허설화되었고 유방군의 부방체제도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비상시 각 도의 모든 군병을 동원하여 대응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유방군체제는 형해화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거주지별로 편성된 속오군체제가 확립되면서 유방군체제는 소멸되었다.
의의
진관체제에 의해 전국적인 국방체제가 제도상 일원화되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상으로는 유방과 번상에 의해 방어체제가 유지되었다. 전국의 주요 군사적 요충지에 배치되었던 유방군의 존재는 조선초기 실제 국방체제를 반영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성우,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0.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오종록, 「조선초기의 營鎭軍」, 『송갑호교수 정년퇴임기념논문집』,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