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당(爲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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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내의 선왕의 위패, 신주, 어진을 임시로 봉안할 때 사용했던 전각.

개설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資政殿)을 중심으로 서쪽에 태녕전(泰寧殿)과 위선당(爲善堂)이 있다. 이들은 경희궁의 북서쪽 영역에 위치하며 조상을 기리기 위한 영역을 형성하였다. 태녕전은 영조의 초상을 봉안하던 곳이며 자정전과 위선당은 종묘의 위패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이다. 태녕전이 혼전으로 사용될 때에는 태녕전에서 봉안하던 어진을 위선당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위치 및 용도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공사가 있을 때에는 위패를 임시로 봉안할 곳이 필요한데, 위선당은 이를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현종 때 영녕전(永寧殿)을 수리할 때와 영조 때 종묘 정전을 증축할 때 경희궁의 자정전과 읍화당(浥和堂), 위선당에 위패를 임시로 봉안했다.

위선당에서는 신주를 모시기도 하였는데, 영조 때 단경왕후(端敬王后)를 복위시키면서 위선당에 신주를 모셨고(『영조실록』 15년 5월 1일), 정조 때 효장세자(孝章世子)와 그 부인을 진종(眞宗)과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하면서 창경궁연복전(延福殿)에 있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다.

위선당은 태녕전의 서쪽에 있다. 위선당의 서쪽에는 영렬천(靈洌泉)이 있는데 바위틈에서 물이 나와 언제나 마르지 않았고 물이 매우 차가워 사람들은 초정(椒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변천 및 현황

위선당의 옛 이름은 영경당(靈慶堂)이다. 1700년(숙종 26)에 위선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경당을 사용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1663년(현종 4)에 영녕전을 수리하기 위해 영경당에 신위를 봉안했던 기록부터 볼 수 있다. 광해군대 경희궁을 창건한 후 숙종대 대대적인 수리 작업이 있었으니 영경당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선당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부터 신위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철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형태

위선당은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만 그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숲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행각과 담장에 의해 독립적인 영역을 형성하며, 영광문(靈光門)으로 태녕전과 연결된다. 남쪽에는 장덕문(章德門)을 두었다. 팔작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묘사되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39년(영조 15) 신비(愼妃)의 신주를 위선당에서 모시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영조실록』 15년 3월 28일). 이때 작헌례를 받은 신주의 주인공이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이다. 중종반정 초기 폐위되었던 왕비를 복위시키는 예를 행하는 과정이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왕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역적의 딸이라 하여 폐위되었다. 영조 때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溫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서울특별시, 『경희궁 태녕전지 건립부지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특별시, 1996.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 이강근, 「정조의 경희궁 운영과 건축」,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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