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運動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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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서양식 교육이 도입되면서 학교 학생들에게 체조나 집단행동 등을 연출시키며 국가의식을 고취하려고 한 행사.

개설

운동회는 1895년(고종 32)에 시작되었다. 초창기 운동회는 경성(京城) (현 서울)에 있던 관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로 진행되어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08년 『독립신문』에는 110회의 운동회가 거행된 기사가 보인다.

내용 및 변천

최초의 운동회는 1895년 5월 12일 을미의숙(乙未義塾)에서 개최되었다. 을미의숙은 1895년 3월에 현채(玄采)가 형식상의 설립자였고 교장은 아유카이 후사노신[點貝房之進]이었다. 7월에 소학교령에 따라 관립소학교로 전환되었다. 을미의숙의 운동회는 동대문운동장(현 서울시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있던 훈련원(訓練院)에서 개최되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300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였다. 을미의숙이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을 주로 하였고 일본 문화 이식을 목표로 하여 운동회의 성격도 일본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890년(명치 23) 전후에 운동회가 전국 소학교와 중학교에 보급되어 연중행사가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발발 후부터 전국적인 학교 행사로 자리 잡았다.

1896년(고종 33) 5월 30일에는 삼선평에서 을미의숙의 후신인 관립소학교의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이 운동회에는 정부 고관들이 참석했고 학생들이 애국가를 불러 국가적 행사의 성격을 보였다. 당시 운동회는 체조와 제식과 같은 군사적 성격이 짙게 내포된 병식 체조행사였다. 관립소학교의 운동회는 1899년(광무 3)까지 매년 봄에 개최되었다. 1897년(광무 1) 훈련원에서 열린 운동회에서는 운동회의 필수품이라고 할 국기와 깃발들이 장식되었고 달리기 종목도 등장한다. 6월에는 영국인이 관리하던 관립영어학교에서도 운동회가 열렸다. 1898년(광무 2)부터는 운동회마다 대규모의 인파가 몰렸고 시상식, 애국가 제창, 대황제 폐하 만세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국민 만들기와 민족을 강조하는 애국심 고취가 주된 목적인 국가 행사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1900년(광무 4)부터 1904년(광무 8)까지 운동회는 운영 경비로 인해 잠시 침체기를 맞는다. 고종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황제권이 행사되던 시기로서 더 이상의 관제적 성격의 행사를 국가 주도로 시행하지 않았다. 1905년(광무 9) 이후부터는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인해 다시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다. 순종이 보위에 오른 뒤인 1908년(융희 2) 봄에는 경성 소재 관사립학교의 연합대운동회가 열렸다. 순종을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의 고위관료가 대거 참석하였다. 당시의 운동회는 창덕궁비원(祕苑)에서 열렸다. 각 학교에서 기예(技藝)가 뛰어난 남녀 학생들을 선발하여 연합운동회(聯合運動會)를 개최하였다. 순종과 황후는 종친(宗親)과 내각의 문무 관리들의 부인들과 함께 관람하였다(『순종실록』 1년 5월 21일).

1907년(광무 11) 5월에는 당시에 또한 여학교의 연합운동회가 장충단에서 개최되었다. 7개 여학교 236명이 참여하였고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런데 1908년 사립학교의 운동회는 반일적 색채를 보여 통감부의 견제를 받는다. 결국 9월 1일 사립학교 훈령으로 운동회가 금지되었다.

참고문헌

  • 『매일신보(每日新報)』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김성학, 「근대 학교 운동회의 팽창: 그 실태와 동인」, 『한국교육사학』33권 1호, 2011.
  • 김현숙, 「대한제국 운동회의 기능과 표상」, 『동아시아 문화연구』48, 2010.
  • 박상석, 「구한말 운동회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변성호, 「구한말 운동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고찰」, 『정신문화연구』3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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