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예(要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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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권의 행사 과정에서 백성의 칭송을 유도하는 행위.

개설

요예(要譽)는 간예(干譽)라고도 하며, 조명(釣名)·고명(沽名)·요명(要名)·민예(民譽) 등도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특히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면서 대민업무의 주도자인 수령의 수취변통과 관련되어 주로 거론되었다(『영조실록』 33년 10월 2일). 당시 백성들의 주 관심사인 세금 문제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얻고자 했던 수령들에 의하여 빚어졌다.

내용 및 특징

지방관은 감찰관이나 관찰사에게 근무 평정을 잘 받아 승진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렇지만 선정(善政)을 베풀어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칭송을 얻는 것은 더 중요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지방관들은 위로 상관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래로는 백성들의 목소리나 그 지역 양반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민들에게 칭송을 얻는 길은 소송을 공정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며, 진휼곡을 가져와 기근을 구제하고, 세금을 줄이는 데 있었다.

특히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재정 수요의 증대로 늘어난 세금은 지역민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지방세의 경우 지역민의 세금 납부 방법을 간소화하고, 국세의 경우 납부 수량을 줄이는 일은 쉽게 칭송을 들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런 일로 수령이 선정을 펴면, 지역민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읍지(邑誌)』에 기록하고 선정비를 세웠다. 또한 생사당(生祠堂)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교체되지 않고 그대로 근무할 수 있도록 상부에 호소하였다. 그것은 본인과 그 후손에게는 큰 영광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승진에도 직결되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당시 수령들은 백성들의 칭송, 즉 요예를 얻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변천

17·18세기 사서에 요예는 매우 부정적으로 거론되었다(『영조실록』 33년 10월 9일). 이는 요예가 선정을 베풀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승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도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관리는 요예를 얻기 위하여 술과 떡을 만들어 제공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는 능력이 있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혹은 위엄스럽다는 명성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현혹하여 요예를 구하는 수령도 있었다. 사실 당국자들이 요예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수령에 의하여 단행된 재정 체계 개편이 중앙재정의 안정적 확보라는 왕조의 목적과 상충되었기 때문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수령은 중앙 권력의 지시에 따라 지방을 지배하는 한편 지방민의 입장을 중앙에 반영시키는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요예는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펴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지만, 중앙 권력과의 충돌을 야기하도 하였다. 가식과 허위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수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예는 왕조의 장기적인 안정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구완회, 「조선후기의 수취행정과 수령의 ‘요예’: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까지를 중심으로」, 『경북사학』 14,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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