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民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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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의 공무 수행에 대한 백성들의 칭찬.

개설

지방관은 감찰관이나 관찰사에게 근무 평정을 잘 받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리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칭송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은 위로는 상관의 눈치를 보지만, 아래로는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백성들에게 칭송을 얻는 길은 소송을 공정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며, 더 나아가 기근을 구제하거나 세금을 줄이는 데 있었다. 특히 세금은 지역민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세금의 납부 방법을 간소화하거나 납부 수량을 줄이는 일은 쉽게 칭송을 들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런 일로 선정을 펴면, 지역민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읍지(邑誌)에 기록하거나 비석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해당 수령이 교체되지 않고 그대로 근무할 수 있도록 상부에 호소하였다. 그것은 본인과 그 후손에게는 큰 영광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진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의 관리들은 백성들의 칭송, 즉 민예를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내용 및 특징

1719년(숙종 45) 이조판서권상유(權尙游)는 수령들이 민예를 구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서울의 각사에 응당(당연히) 상납해야 하는 여러 가지의 미포(米布)를 혹은 경감해 주기도 하고 혹은 기한을 늦추어 주기도 하면서 백성의 칭찬을 요구한다.” 고 말하였다(『숙종실록』 45년 4월 10일). 수령이 민예를 얻기 위해 상부에 로비하여 상납하는 세금의 수량을 경감시키고 기일을 연기시켰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1721년(경종 1)에 “재상(災傷)이 있으면 전답을 조사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정치이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여도 사사(私事)가 공사(公事)를 이기지 못하는 것인데, 수령들은 함부로 허재(虛災)를 보고하여 미혹한 짓으로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언급도 보였다(『경종실록』 1년 7월 5일). 이 역시 수령이 지역민의 전세(田稅)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풍년이 든 전답을 흉년이 든 것으로 허위 보고하여 민예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납세 방법을 바꾸어 민예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1743년(영조 19)에 대사간송익보(宋翼輔)는 지방에서 청(廳)이나 고(庫)를 설립하고 돈을 이식하여 민역을 막는 일은 일시적인 민예를 보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변천

민예는 선정을 베풀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승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시도되었다. 그래서 어떤 관리는 민예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술과 떡을 제공하여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는 능력이 있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혹은 위엄 있다는 명성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현혹하여 민예를 구하는 수령도 있었다. 민예는 선정을 펴려는 목민관(牧民官)의 본분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가식과 허위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구완회, 「조선후기의 수취행정과 수령의 ‘요예’: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까지를 중심으로」, 『경북사학』 14,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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