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요동도지휘사사 |
한글표제 | 요동도지휘사사 |
한자표제 | 遼東都指揮使司 |
상위어 | 오위도독부(五軍都督府) |
하위어 | 위소(衛所) |
동의어 | 요동도사(遼東都司) |
관련어 | 요양(遼陽), 요양성(遼陽城), 요양행성(遼陽行省), 요양도위(定遼都衛), 유익(劉益), 정료도위(定遼都衛)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명 |
왕대 | 명 |
집필자 | 남의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6월 6일, 『태조실록』 2년 8월 29일 |
명나라가 북원을 축출하고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기구.
개설
명나라는 1371년(명 홍무 4) 요양(遼陽)으로 진출하면서 정료지휘도지휘사(定遼指揮都衛使司), 약칭하여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375년(명 홍무 8) 군제의 개편으로 정료도위를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약칭하여 요동도사(遼東都司)로 개편하였다. 요동도사는 원의 요양행성(遼陽行省) 행정 중심지였던 요양에 설치되었으며 요동도사 아래 25개의 위를 두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71년 2월 요동에서는 원의 요양행성평장(遼陽行省平章)이던 유익(劉益)이 우승(右丞)동준(董遵)을 파견해 요동주군(遼東州郡)의 지도와 관련 서적을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을 표시하였다. 유익의 투항은 명군에게 요남(遼南) 지역을 넘겨주는 중대한 역할을 함으로써 명나라의 요동 진출을 한층 쉽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건국 직후였기 때문에 요동을 점거하는 데 매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고려는 북원(北元)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동녕부(東寧府) 등을 공격하고 있었으며, 요동의 중심부인 요양 역시 북원이 장악하고 있어서 명군은 겨우 요남 지역에 상륙하여 요동 진출의 거점을 힘겹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요양을 점거하고 있던 북원의 유익이 투항하였으므로 명은 요동을 점거하기 위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명나라는 곧 요양에 정료도위를 설치하고 유익을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임명함으로써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조직 및 역할
1375년 11월 전국적으로 각처에 설치한 도위(都衛)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체제로 변경되면서 정료도위 역시 요동도지휘사사, 약칭하여 요동도사 체제로 전환되었다. 명은 중앙에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였는데 요동도사는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에 속하도록 하였다. 요동도사에는 주현(州縣)제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요동도사는 요동 최고의 군정합일 기관이었다. 그리고 1387년(명 홍무 20)을 전후하여 요동도사는 요동지구에 다수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요동도사는 아래에 25개의 위를 두었다. 1387년 명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을 제압하기 이전 요동도사는 금주위(金州衛), 복주위(復州衛), 개주위(盖州衛), 해주위(海州衛), 요해위(遼海衛)와 요양에 정료좌위(定遼左衛), 정료우위(定遼右衛), 정료전위(定遼前衛), 정료후위(定遼後衛), 동녕위(東寧衛)를, 심양에 심양중위(瀋陽中衛), 심양좌위(瀋陽左衛) 등 12개의 위를 설치하였는데, 이 12개의 위는 요남에서 요북으로 향하고 있으며 요동의 구릉과 평원을 전략적으로 적당히 이용하면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위의 설립 시기를 대체로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시기는 1371년부터 1375년으로, 요동도사의 방어체계가 한창 건립되는 시기이다. 이때는 납합출이 남하하기 이전으로 방어체계의 기초가 요남에서 요북으로 향하면서 금주(金州)·개주(蓋州)·요양(遼陽) 3개 지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제2시기는 1375년부터 1381년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요동도사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1376년 해주위, 1378년 요해위, 1381년 복주위를 건립하였다. 이 시기의 방어체계는 기본적으로 6개의 지점에 설치되고 있는데, 금주·복주(復州)·개주·해주(海州)·우장·요양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제3시기는 1381년(명 홍무 14)부터 1387년(명 홍무 20)이다. 납합출과의 금산(金山) 전투 이전 시기로, 이 시기에 설치된 위는 주로 1386년의 동녕위, 심양중위, 1386년의 심양좌위이다. 요양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심양이 새로운 방어체계의 중심이 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요동도사 소속 25위 중 중요한 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만위(三萬衛)는 훈춘강(訓春江), 일명 혼춘강(琿春江) 유역의 알타리(斡朵里) 지역에 처음 설치하였으나, 곧 식량 부족의 문제에 직면해 요동도사 북부에 해당하는 개원(開原)으로 옮겼다. 개원은 지금의 개원시로 동쪽으로는 여진과 서북쪽으로는 몽골 올량합(兀良哈)을 통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령위(鐵嶺衛)는 1388년(명 홍무 21) 지금의 심양 동남쪽에 해당하는 봉집보(奉集堡)에 설치되어 요동의 여진인·몽골인·고려인·한인(漢人) 등을 관할하였는데, 1393년(명 홍무 26) 요동의 철령위를 심양과 개원의 경계인 고은주(古嚚州: 현 철령현(鐵嶺縣))로 이전하여 시급한 북방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심양중위(瀋陽中衛)는 1387년 심양에 설치되었으며, 그 아래 5개의 천호소(千戶所)를 두었다. 후에 심양성 동북쪽 80리에 무순(撫順)·심양성 북쪽 40리에 포하(浦河) 등의 천호소를 증설하였는데 무순천호소는 1409년(명 영락 7) 심양중위에 병합시켰다.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에 해당하는 요서 지역의 광녕위(廣寧衛)는 1390년(명 홍무 23)에 설치되었으며 요왕(遼王)이 파견되었다. 광녕위는 명 초에 마시(馬市)가 설치된 지역이다. 1393년(명 홍무 26) 광녕성 내에 광녕중위·좌위·우위 등의 3위와 광녕전위·후위 등을 설치하였다.
의주위(義州衛)는 명 초기 요서 지방 의주성(義州城) 내에 설치하였으며, 1410년(명 영락 8) 광녕후둔위(廣寧後屯衛)를 편입하여 그 역량을 강화하였다.
요령성 흥성(興城)에 위치한 영원위(寧遠衛)는 1428년(명 선덕 3) 정월에 광녕전위와 광녕중둔위를 영원위에 병합시켜 이 지역의 역량을 크게 강화하였다. 영원위는 1년에 20만 9천 근의 해염(海鹽)을 세금으로 바칠 정도로 해염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정료좌위와 정료우위는 1373년(명 홍무 6)에 요양성 내에 설치되었으며 정료우위는 1480년대에 명나라가 요동팔참(遼東八站) 지역을 점거하면서 전초기지인 봉황성(鳳凰城)을 전문적으로 관할하였다.
정료후위는 요양성 내에 설치되어 요동도사의 서쪽을 관할하고 정료전위는 도사(都司)의 동북쪽을 관할하였다. 정료중위는 1384년(명 홍무 17)에 설치되어 요동도사와 같이 요양성, 즉 지금의 요양시 노성(老城)에 설치되어 요동도사의 동남쪽을 방어하였다.
동녕위(東寧衛)는 1380년(명 홍무 13) 동녕(東寧)·남경(南京)·해양(海洋)·초하(草河)·여진(女眞) 등 5개의 천호소로서 설립되었으나 다시 1386년(명 홍무 19) 그 전략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동녕을 위(衛)로 승격시키고 그 주위에 좌·우·중·전·후의 5개소를 설치하였다. 동녕위는 요양성 북쪽으로 이전된 후 요양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조선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동녕위는 많은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요동도사는 동녕위의 조선인들을 이용해 통역, 사신접대와 보호 등 대조선 외교정책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요령성 개주시(盖州市)에 위치한 개주위는 바다에서 10리(약 4㎞) 정도 떨어진 개주성(盖州城)에 설치하여 바다와 근처의 해도(海島)를 방어하였다. 요녕성 해성시(海城市)에 위치한 해주위는 1376년 해양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바닷길의 중요지점을 방어했다.
요령성 와방점시(瓦房店市)에 위치한 복주위는 1381년(명 홍무 14)에, 금주위(金州衛: 한자 중복 삭제)는 1375년(홍무 8)에 금주성(金州城)에 설치되었는데, 금주위는 요동도사 소속 25위 중에서 인구가 상당히 많은 위로 역시 바다를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소의 설치를 통해 명나라는 홍무 시기 요동도사와 25위 중심의 위소체제를 1단계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변천
요동도사는 초기에 조선과 명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 초 북원을 축출하는 데 많은 공마(貢馬)가 필요할 경우 명은 요동도사를 통해 조선과 말을 교환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2년 6월 6일). 또한 전란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넘어올 경우 이들을 쇄환하거나 추포하는 역할도 요동도사를 통해 처리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2년 8월 29일). 이처럼 요동도사는 대조선 외교의 창구 역할, 여진 정벌 등 요동과 관련된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매우 중요한 군사기구였다. 그러나 명 후기로 갈수록 요동 마정(馬政)의 실패, 인구의 감소, 둔전제도의 와해와 토지의 침탈, 관리들의 부패, 군인들의 반란 등과 같은 내부적 요인과 후기로 갈수록 강성해지는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로 요동도사의 중요 군사 거점인 요양과 심양, 개원, 무순 등이 여진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요동도사 방어체계는 점차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 楊暘, 『明代遼東都司』, 中州古籍出版社, 1988.
- 張士尊, 『明代遼東邊疆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002.
- 叢佩遠 主編, 『中國東北史』, 吉林人民出版社,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