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獄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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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옥(獄)에서 죄수들에게 사용하던 각종 도구.

개설

넓은 의미의 옥구(獄具)는 신체형을 가할 때 사용하는 태(笞)·장(杖) 등 형장, 죄인을 고문할 때 사용하는 고문 도구, 죄인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 등을 모두 포함하며, 조선시대에 옥구(獄具)를 형구(刑具)라고도 하였다. 『대명률』에 등장하는 옥구는 태(笞)·장(杖), 신장(訊杖), 가(枷), 추(杻), 철색(鐵索), 요(鐐) 등이나, 『흠휼전칙』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철색(鐵索), 요(鐐) 대신에 쇄항철색(鎖項鐵索), 쇄족철색(鎖足鐵索)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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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

먼저 태(笞)와 장(杖)은 신체형을 가할 때 쓰던 형장으로, 죄인의 볼기를 가격하였다. 태·장 모두 굵은 편을 손으로 잡고 가는 편 끝으로 죄인의 볼기를 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태는 길이가 109㎝이며, 굵은 편 지름[大頭徑]이 0.84㎝, 가는 편 지름[小頭徑]이 0.53㎝이며, 장은 길이가 109㎝이며, 굵은 편 지름이 0.99㎝, 가는 편 지름이 0.68㎝이다. 태·장의 재료는 물푸레나무[水靑木]를 사용하였거나 물푸레나무가 없는 경우에 다른 나무를 대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장(訊杖)은 고문을 가할 때 쓰는 형장으로, 『대명률』에 규정된 신장은 태·장과 같이 회초리 모양이며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흠휼전칙』에서는 손잡이 부분은 둥글고, 타격 부분은 넓적하게 만들었다. 사용 방법은 죄수의 무릎 아랫부분 중에서 정강이(膁肕)를 제외한 뒷부분과 옆 부분을 치도록 하였으며, 1차에 30대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대명률』에서는 신장의 재료로 형장(荊杖)을 들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696년(숙종 22) 왕의 전교를 통해 볼 때 버드나무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장(訊杖)은 일반신장(一般訊杖)과 추국신장(推鞫訊杖), 삼성신장(三省訊杖) 세 가지로 나뉘는데, 길이는 모두 109㎝로 동일하나 두께와 너비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가(枷)는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이다. 가(枷)도 신장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모두 길이가 172㎝, 목을 넣는 부분의 둘레(頭闊)가 37㎝로 같다. 무게는 사죄(死罪)를 범한 죄수에게 씌우는 것이 22근(斤: 14,123g), 도류(徒流) 죄수에게 씌우는 것이 18근(11,555g), 장죄(杖罪)를 범한 죄수에게 씌우는 것이 14근(8,987g)으로, 중죄수일수록 그만큼 무거운 칼을 쓰도록 하였다. 가(枷)의 재료는 마른 나무(乾木)로 만들며, 무게를 가판(枷板)에 새겨 넣도록 하였다.

추(杻)는 죄인의 손에 채우는 일종의 수갑이다. 두 손 모두 채우지는 않고 오른손만 채우도록 규정하였다. 마른 나무[乾木]로 만들며, 길이는 50㎝, 두께는 3.12㎝이다. 추의 착용 방법은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나온다. 즉, 추(杻)를 가(枷) 위에 고정시킨 후 오른쪽 팔꿈치를 추(杻)에 넣고 못을 박도록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오른쪽 팔만을 추(杻)에 채워 가(枷)에 고정시키되 왼손은 자유롭게 한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쇄항철색(鎖項鐵索)은 길이가 125㎝로 죄인의 목에 감는 쇠사슬이며, 쇄족철색(鎖足鐵索)은 길이가 156㎝으로 죄인의 발을 감는 쇠사슬이다.

변천

옥구 가운데 가(枷), 추(杻), 쇄항철색(鎖項鐵索), 쇄족철색(鎖足鐵索) 등의 착용 대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가(枷)의 경우 『경국대전』에는 상천인(常賤人)에게만 가(枷)를 씌우며, 종묘사직과 관계되거나 특교(特敎)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친(議親)·공신(功臣)·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과 사족부녀(士族婦女)·서인부녀(庶人婦女) 등은 가(枷)를 씌우지 않도록 하였다. 이후 1747년(영조 23) 여자에게는 가(枷)를 씌우지 못하도록 하는 원칙을 재천명하였고, 1772년(영조 37)에는 유생(儒生)들에게도 가(枷)를 씌우지 말도록 정식을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추(杻)는 『경국대전』에서는 상천인(常賤人) 가운데 도죄(徒罪) 이상을 범한 남자 중죄수들에게 채우도록 하였으나, 『흠휼전칙』 제정 당시에는 사죄(死罪)를 범한 남자 죄수에게만 채우도록 제한하였다.

한편, 의친(議親)·공신(功臣)·당상관(堂上官)과 사족부녀(士族婦女)가 사죄(死罪)를 범한 경우 쇄항철색(鎖項鐵索)을 채웠다. 그리고 당하관(堂下官)과 서인부녀(庶人婦女)의 경우에는 도류(徒流)·사죄(死罪)를 범하면 쇄항철색과 쇄족철색(鎖足鐵索)을 모두 채우며, 장죄(杖罪)를 범한 경우 쇄항철색만을 채웠다. 다만 가(枷)·추(杻)와 마찬가지로 종묘사직과 관계된 큰 죄를 범하거나, 왕의 특교가 내려지는 경우에는 이같은 제한이 없었다.

의의

조선시대 사용된 옥구는 당대 사회의 처벌 체계와 인권 의식 등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법규에 규정된 옥구 규정과 실제 죄수에게 행해졌던 옥구 착용 사례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함으로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흠휼전칙(欽恤典則)』
  • 박병호, 『近世의 法과 法思想』, 도서출판 진원, 1996.
  • 서일교, 『朝鮮王朝 刑事制度의 硏究』, 韓國法令編纂會, 1968.
  • 심재우, 「정조대 『欽恤典則』의 반포와 刑具 정비」, 『奎章閣』22, 1999.
  • 심재우, 「조선후기 형벌제도의 변화와 국가권력」, 『國史館論叢』102, 2003.
  • 심희기, 「朝鮮時代의 拷訊」, 『社會科學硏究』5-1, 1985.
  • 조윤선, 「英祖代 남형, 혹형 폐지 과정의 실태와 欽恤策에 대한 평가」, 『朝鮮時代史學報』4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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