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척(營造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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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부피의 측정, 병기(兵器)·선박의 건조, 건축 등에 사용한 자.

개설

길이를 재는 단위로 지금처럼 미터(m)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고유한 척도가 남아 있는데 이것을 자[尺]라고 한다. 보통 한 자는 10치[寸]이고, 치의 10분의 1을 푼[分]이라 한다. 치는 손가락 한 마디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서양에서는 이를 인치(inch)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척도는 인체에서 기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척도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편차가 커 지구 자오선의 1/40,000,000을 1m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어 세계적으로 척도가 통일되었다. 하지만 미터법은 사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 건축과 문화를 이해하려면 척도법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한옥을 짓는 목수는 곡척(曲尺)을 사용하여 자 단위로 작업하기 때문에 고건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척도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또 척도는 사용하는 곳에 따라 다르다. 음악의 음률을 교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 것은 황종척(黃鐘尺)이고, 옷감 재단용으로 사용된 것은 포백척(布帛尺)이며, 논밭의 크기를 재는 양전(量田)과 도로의 거리를 재는 이정(里程)에 사용된 것은 양전척(量田尺)이라 한다. 양전척으로는 보통 주척(周尺)을 사용하였으며, 주척은 성곽과 같은 거대한 토목 공사에도 사용하였다. 건축에 주로 사용하였던 척도는 영조척(營造尺)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조척은 조선시대에 주로 사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고려척(고구려척),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척(唐尺)과 주척이 사용되었다. 영조척은 건축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자를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원경제지』 「본리지(本利志)」권제1에서 우리나라의 척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 때 허조(許稠)가 북경에 갔다가 종이에 그려 놓은 주척을 강천주의 집에서 얻었는데 이는 곧 원나라 황후의 재정을 관리하는 수장인 자정원사가 소장한 아척을 전한 것이다. 지금의 표준 척에서 0.25척을 뺀 0.75척을 사용한다. 이것은 지금의 성척(省尺)으로 0.75척이 조금 못 되는 길이에 해당하며, 비로소 이것으로써 척제를 정한 것이다. 무릇 사대부 가묘(家廟)의 신주나 천문에 필요한 누기(漏器), 도로의 이수, 활터의 보법 등은 모두 이것에 의거하여 법식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대개 세종 때의 척제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주척, 둘째는 황종척, 셋째는 조례기척(造禮記尺), 넷째는 영조척, 다섯째는 포백척(布帛尺)이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오직 『경국대전』에 각각의 자가 실려 있어 도수를 서로 비교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내용은 주척을 황종척에 맞추어 보면 주척은 황종척의 0.606척이고, 영조척을 황종척에 맞추어 보면 영조척은 황종척의 0.899척이다. 그리고 조례기척을 황종척에 맞추어 보면 조례기척은 황종척의 0.823척이고, 포백척을 황종척에 맞추어 보면 포백척은 황종척의 1.348이다”라고 하였다.

『경국대전』 「공전(工典)」 도량형조에 따르면 여러 관사와 고을의 도량형은 공조에서 제조하는데 개인이 사사로이 만든 것은 해마다 추분에 서울은 평시서에서, 지방은 거진(巨鎭)에서 교정하고 낙인(烙印)한다. 도의 제도는 10리(釐)를 1푼으로 하고, 10푼을 1치로 하며, 10치를 1자로 한다. 10자는 1장(丈)이 된다. 주척을 황종척에 비교하면 주척 1자의 길이는 황종척으로 0.606자이고, 영조척을 황종척에 비교하면 영조척 1자의 길이는 황종척으로 0.899자에 해당한다. 조례기척 1자는 황종척으로 0.823자이고, 포백척 1자는 황종척으로 1.348자이다. 각 척도를 1430년(세종 12) 제정한 주척 1자 20.8㎝로 환산하여 산출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들은 실제 남아 있는 유물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모두 다르며 시대에 따라서도 변화하였다. 『임원경제지』에서는 관동 삼척부에 구리로 주조한 포백척이 있었는데, 그 뒷면에 1446년(세종 28) 12월 정확히 고정하여 새로 제작한 포백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50년(영조 26) 이 자를 가져다가 『경국대전』에 기록된 도수로 당시 쓰던 척도를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제도는 『증보문헌비고』에 자세히 나와 있다.

변천

건축에 사용된 영조척도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구체적인 연구가 없어서 상세한 변화는 살펴볼 수 없으나 대개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일본 등에서는 한 자가 35.5㎝ 정도인 고려척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에서는 20~23㎝ 내외의 중국 한척(漢尺)이나 당척 및 주척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고려척도 사용되었으나 당척과 주척도 함께 사용되었다. 불국사 창건에는 고려척이 사용되었으며,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만들 때는 주척이 쓰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도량형 제도가 새로 제정되었다. 태조 때 초창할 당시 숭례문은 32.21㎝의 영조척이 사용되었으며, 1430년 도량형 제도를 정비하면서 영조척은 31.22㎝가 되었다. 개정된 도량형은 세종 때 숭례문 개건과 원각사10층석탑을 만들 때 적용된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성종 때 중건된 창경궁 명정전은 영조척이 31.07㎝로 조사되어 세종 때 규정보다 조금 작아졌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반적인 영조척은 세종 때 정비된 31.22㎝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일본 곡척과 같은 30.30㎝가 사용되었다. 1963년 미터법 기준이 제정되면서 전통적인 척도는 점차 사라지고 미터법이 보편화되었다.

의의

목수들은 집을 지을 때 건축에 필요한 자부터 만든다. 작은 자는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곡자를 사용하지만, 주(柱)와 칸 등을 재는 긴 자는 별도로 장척(長尺)이라 하여 현장에서 만들어 사용하였다. 얼마 전 경복궁 근정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고종 때 중건 공사에서 사용한 장척이 지붕 속에서 나왔다.

자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주로 고려척을 사용하였는데 보통 35.5cm 내외로 지금보다 길다. 일본에서도 아스카 시대에는 고려척을 사용하였는데, 동양 목조 건축에서 가장 오래된 법륭사(法隆寺)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자는 문화교류사를 규명하고 건물의 나이를 추정하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국제화 시대에 세계적인 척도의 통일은 동의하지만 획일적인 적용에는 문제가 있으며 융통적인 운용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척도는 길이를 재는 단순한 수치를 떠나, 그 안에는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목수들은 주로 일본 곡자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 곡자는 한 자가 30.30㎝이다. 만약 이 자를 가지고 한 자가 31.22㎝로 지은 숭례문을 개건한다면 규모가 축소될 것이다. 크기를 맞춘다고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소수점 단위로 공사해야 한다.

이처럼 자는 문화재 원형 보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로 지은 문화재를 미터법을 사용하여 수리하는 것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문화유산이 우리의 정신인 것처럼 그 속에 담긴 영조척도 단순한 수치 이전에 민족의 정신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 김왕직, 『알기 쉬운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2007.
  • 박흥수, 『한·중 도량형제도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9.
  • 서유구 지음, 정명현·김정기 옮김, 『임원경제지 본리지』, 소와당, 2008.
  • 『백제의 도량형』, 국립부여박물관, 2003.
  • 『역주 경국대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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