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작공(營作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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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중앙 상납용 진상물이나 공물을 군현에서 지방 영문에 곡물이나 현금으로 대납하면 영문에서 전문업자를 두어 그것을 중앙에 무납하는 것.

개설

영작공(營作貢)은 영공(營貢)이나 저공(邸貢)이라고 하였다. 외읍의 영주인(營主人)이나 영문(營門)의 하속(下屬)들이 외공(外貢)의 폐단을 막는다는 이름 아래에 지방영문, 즉 감영·병영·수영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는 관상·부상·도고 등의 상인들과 서로 몰래 모의하여 대동법 이후 잔존한 토공(土貢)·방납(防納)·읍공(邑貢)을 영공(營貢)으로 바꾸었다. 이들 작공배들은 작공물을 대부분 영문 아래의 유통 구조에서 구매하였으나, 인근의 산지나 시장에서 또는 머나먼 서울 시장에서 구매하여 납부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영작공은 영저 유통경제의 성장에 편승하여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려는 작공배들의 노력에 의해서 집요하게 추진·확장되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 1783년(정조 7)에 임금이 전라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고 “호남의 공헌(貢獻)은 읍에서 봉진하는 것이 매우 적고 영저(營邸)에서 봉진하는 것이 매우 많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영작공은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곡성의 경우 삭선진상(朔膳進上)을 영저리(營邸吏)에게 전부 맡길 정도였다. 어느덧 외읍의 진상물을 영저리가 담당하여 봉진하는 것이 상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영작공이 성행하자, 영문에서는 작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담 기구를 두기도 하였는데, 함경도에서 진헌고(進獻庫)를 두어 천신(薦新)·삭선·별진상을 납부하였던 것이다.

변천

영작공은 영속(營屬)과 도고 무리가 모의하여 작공가(作貢價)를 높게 책정함으로써 군현의 재정 부담을 무겁게 하는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5~8년조의 공가를 미리 받고 유용을 하여 관의 물자 조달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바닷가 고을에서 어물가를 가지고 멀리 떨어진 감영에 모이는 것도 군현의 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영작공을 경작공(京作貢)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추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작공을 혁파하고 각 읍으로 하여금 직접 납부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이권으로 자리를 잡은 영작공은 영공인들의 반발로 혁파되지 않고 조선후기 내내 존속하였다.

의의

대동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진상과 공물이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그것을 외읍에서 직접 상납하는 데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 업무를 감영· 수영·병영 등 영문에서 영작공이라는 이름으로 대행함으로써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 김동철, 『조선후기 공인연구』, 한국연구원, 1993.
  •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오성, 『조선후기 상인연구』, 일조각, 1989.
  •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공인권·전계 창설운동과 난전활동」, 『규장각』 10,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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