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경묘(永慶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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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5대조 이양무(李陽茂)의 부인 삼척이씨(三陟李氏)의 묘.

개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는 조선초기부터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와 그의 부인 삼척이씨의 묘로 알려진 두 기의 묘가 있었다. 나라에서는 이 두 묘가 왕실의 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수호만 할 뿐, 수축하거나 제향을 지내지 않았다. 대한제국 건립 후인 1899년(광무 3)에 이르러 마침내 왕실의 묘임을 인정받아, 이양무의 무덤은 ‘준경(濬慶)’, 삼척이씨의 무덤은 ‘영경(永慶)’이라는 묘호를 받고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되었다.

조성 경위

이양무의 부인 삼척이씨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로, 그의 묘인 영경묘는 현재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저리에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미로면 활기리에는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이 두 묘의 존재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알려졌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정에서는 왕실의 묘로 인정하지 않고 보호만 하였다.

선조대에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정철(鄭澈)이 이 묘가 목조의 부모 묘라며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조선중기에는 삼척이 아닌 황지 부근에 이양무의 무덤이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역시 무덤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고종 대인 1898년(광무 2)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이종건(李鍾健) 등의 건의를 계기로, 이듬해에 삼척의 두 무덤이 목조의 부모 묘로 인정을 받았다.

조성 상황

영경묘는 산세가 가파른 까닭에 정자각을 묘가 보이는 곳에 세우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일자(一字) 형태로 건립하였다. 정자각 옆에는 비각을 두었는데, 표석 뒷면의 음기(陰記)는 고종이 직접 지었다(『고종실록』 36년 5월 25일). 재실(齋室)과 전사청(典祀廳)은 활기동에 세워 준경묘와 같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향은 1년에 한 번 청명에 거행하였으며, 헌관(獻官)은 강릉군수(江陵郡守)가 맡았다. 1981년에 준경묘와 더불어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상황

전주가 본관인 태조의 선조가 한반도 북쪽으로 이주한 것은 목조이안사에 이르러서였다. 목조는 전주를 떠난 뒤 함흥에 터를 잡기 전에 잠시 동안 강원도 삼척에 기거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때 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그들을 안장했다고 한다.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한 사실은 『태조실록』「총서」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목조는 관기(官妓) 문제로 산성별감(山城別監)과 갈등을 빚고 위협을 느낀 나머지 강원도 삼척현으로 옮겨 갔는데, 이때 따라간 사람이 170여 가구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의 가계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환조이자춘(李子春)의 비문(碑文)에는 관련 내용이 없고, 목조가 의주 즉 덕원수령(德源守令)으로 있다가 인척 관계로 인해 삼척으로 이주했다고 되어 있다. 정총이 지은 「유명조선국환왕정릉비명(有明朝鮮國桓王定陵碑銘)」에도 목조가 의주에서 벼슬을 한 뒤 원나라에서 벼슬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삼척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한제국기에 준경묘와 영경묘를 조성한 것은 목조의 삼척 이주설과 무덤의 풍수적 입지 등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며, 구체적인 증거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삼척양묘지(三陟兩墓誌)』
  • 『조경단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肇慶壇濬慶墓永慶墓營建廳儀軌)』
  • 『조야기문(朝野記聞)』
  • 『준경전도(濬慶全圖)』
  • 『척주지(陟州志)』
  • 이동희, 「풍패지향 전주,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역사와 성격」, 『전주학연구』4, 전주역사박물관, 2010.
  • 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준경묘와 영경묘를 중심으로-」, 『종교연구』6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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