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어(譯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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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언어문자를 번역하거나 통역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

내용 및 특징

역어(譯語)는 갑국의 언어문자를 을국의 언어문자로 번역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역과 시험 방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 관계를 중요시하여 역관의 책무를 긴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역관들이 한어(漢語)만 익혀서 경사(經史)의 학문을 알지 못하여, 중국 사신의 말이 경사에 미치면 내용을 알지 못하여 응대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1404년(태종 4)에 한어를 잘하고 경학에 밝은 자를 선택하여 훈도관(訓導官)을 삼는 조치를 취하고(『태종실록』 4년 8월 20일), 사신(使臣)이 왕래하는 평양과 의주에 역학훈도(譯學訓導)를 설치하여 역학생도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2월 9일). 그리고 역어를 전업으로 하는 이들 중 직임이 있는 자는 한학강이관(漢學講肄官)이라 부르고 직임이 없는 자는 한학생(漢學生)이라 칭하는(『세종실록』 16년 1월 26일) 등 역어 장려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역어 교육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어가 정밀하지 못하여 역관들이 물건을 매매할 때 쓰는 일상어도 능히 통달하지 못해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에 전하는 말이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사역원 제조(提調)들이 거의 역어를 알지 못하여 취재(取才) 시험을 볼 때 역관들에게 맡기다 보니 인정으로 사사로움을 따르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에 1493년(성종 24) 예조 판서성현의 건의에 따라 사역원 제조는 한어를 아는 자로 임명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4년 9월 1일).

역어는 역관의 직능으로 중요시되어 역관을 선발하는 역과 시험 방법에 포함되었다. 역과 시험 방법은 강서(講書), 사자(寫字), 역어(譯語)로 구분하였다. 한학(漢學)은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를 임문고강(臨文考講)하고, 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 청학[淸學])은 원어 역학서의 문자를 베껴 쓰는 시험인 사자 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언어문자를 번역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시험인 역어를 실시하였다. 역과 초시와 복시에서 한학·몽학·왜학·여진학 모두 『경국대전』을 보고서 번역하게 하였다. 여진학은 1667년(현종 8)에 청학으로 개칭되었다. 식년시와 증광시 역어 시험 과목은 『경국대전』으로 동일하였다.

역관에 대한 사회 인식은 낮았지만 국가 운영에서 실제로 그들의 역어 능력을 중요시하여 때로는 상중(喪中)에도 벼슬을 하게 하는 기복(起復)까지 시켜 사행(使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김질(金礩)이 북경에 가는데 통사(通事)로 마땅한 사람이 없자 친상(親喪) 중이던 전(前) 사역원(司譯院) 정(正) 장자효(張自孝)를 삼년상이 지나기 전에 다시 벼슬에 임명하여 사행에 데려가도록 하였다(『성종실록』 5년 8월 17일). 이는 장자효가 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신들이 반대하자 성종은 대신을 보내지만 말을 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역관에게 있으니 혹시 그 말을 잘못 전하게 되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5년 8월 18일).

역대 왕들은 훗날의 이해관계가 역관에게 달려 있다고 인식하였고, 역관들이 국가의 기밀사를 발설하게 되면 근심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사행에서 돌아온 역관의 보고서는 외국 정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역관은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들의 견문사목(聞見事目)이나 별단(別單)은 중국·여진·일본·유구 등 주변 국가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한우근 외, 『역주 경국대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송기중, 「『경국대전』에 보이는 역학서 서명에 대하여」, 『국어학』14, 1985.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1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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