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量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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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부과 기준을 설정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양안에 기록하는 사업.

개설

농업 중심의 전통 시대 국가에서는 토지가 세금 부과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양전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기록하는 작업으로서, 국가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조선에서는 동일한 수확량이 나오는 토지를 동일한 결부 단위로 판정하는 결부법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양전 결과 같은 결로 판정된 토지에는 같은 세액을 부과하였다.

본래 양전은 20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으나(『성종실록』 2년 7월 14일), 비용과 행정력이 많이 투입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러한 규칙이 준수되지 못하였다. 조선건국 직전에 시행되었던 1391년의 기사양전(己巳量田)을 포함하여 조선초에는 모두 3번에 걸친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고, 도(道) 단위의 양전도 여러 차례 시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선조대와 인조대 각각 양전이 실시되었고, 숙종대에는 조선의 마지막 전국 규모의 양전인 경자양전(庚子量田)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전세 수취 방식이 비총제(比總制)로 전환되면서 과세의 기준을 정비하려는 목적의 양전 사업은 그 의미를 잃어 갔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서는 토지의 절대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토지의 등급을 나누고 이에 따라 면적을 측량하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6일). 이를 결부법(結負法)이라 하였다. 조선초에는 토지의 등급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절대 면적은 작고 토지 생산성은 높았다. 이렇게 측량된 토지는 각각 절대 면적을 달리하더라도 수확량에서는 동일하게 판정되어 1결당 국가에서 부과하는 세액은 같았다. 조선초에는 1결마다 수확량이 300두(斗)로 설정되었으며 세액은 그 1/10인 30두였다.

양전 사업을 위하여 중앙에서는 양전경차관(量田敬差官)을 파견하여 그 지역의 수령·서리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또 사업 과정을 관리·감독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각 토지마다 양전 절차는 우선 해당 토지의 토질·입지 조건 등을 고려하여 전품(田品)을 책정하고, 전품마다 기준을 달리하여 면적을 측정하였다. 국초에는 이러한 기준을 손가락의 길이인 지(指)를 사용하였는데, 이후에는 척(尺)을 사용하였다.

해당 토지의 모양이 불규칙할 경우 삼각형 내지는 사각형으로 분할하여 측정하였으며, 그 측정 결과는 양안에 기록하였다. 양안에는 토지 면적과 함께 경작자인 기주(起主), 해당 토지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지물을 기록한 사표(四標) 등의 정보를 함께 기록하였다. 아울러 기록된 토지는 5결을 기준으로 자호(字號)를 부과하여 정(丁)으로 편성하였다. 자호는 천자문의 순서로 기록되었다. 5결 단위의 자호는 국가에서 각사(各司)의 위전(位田)이나 관원에 대한 과전(科田)으로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할 때 기준 단위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양안은 해당 읍과 도, 그리고 중앙의 호조(戶曹)에 각각 1부씩 보관되었다.

조선의 최초 양전은 태종대에 이루어졌으나, 조선건국 1년 전 이루어진 기사양전 역시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건국 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후 과전법의 토대가 된 양전이므로 어떤 면에서 기사양전을 조선 최초의 양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후 1405년(태종 5)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6도에서 을유양전(乙酉量田)을 실시하였으며(『태종실록』 5년 9월 5일), 1428년(세종 10)부터 1432년(세종 14)에도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다(『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특히 세종대의 양전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그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전체 전결수가 1,600,000결을 상회하였다. 이는 조선 전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수였다.

변천

조선의 양전법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는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 도입과 함께 나타났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우선 이전까지 3등으로 판정하던 전품을 6등으로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기준 척 역시 6등급으로 세분화하였다. 또한 면적을 판정할 때 주척(周尺)에 의거한 기준 척을 도입하고 각 전품별로 기준이 되는 자[尺]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다. 이때 1등급 토지와 6등급 토지의 절대 면적은 약 4배 차이로 설정되었다. 1결당 수확량 역시 400두로 상향 조정되었는데, 그에 대한 수취량은 그 1/20인 20두로 결정되었다. 또한 경작을 지속할 수 있는 토지는 정전(正田)으로, 경작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는 토지는 속전(續田)으로 편성하여 각각 따로 양안을 작성하였다.

공법 도입 이후의 양전은 세종 생전에는 실시되지 못하였고, 15세기 후반 세조대부터 도 단위로 시행되어 16세기 초에 완결되었다. 이후에도 양전은 몇 차례 도 단위로 시행되었으나 그 양전 결과는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경작지가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양전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1603년(선조 36)부터 1604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이(『선조실록』 36년 12월 20일) 1634년(인조 12)에는 갑술양전(甲戌量田)이 시행되었다. 특히 갑술양전은 임진왜란 이전의 전결수에 거의 상응하는 전결의 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719년(숙종 45)에서 1720년까지 다시 한 차례의 전국 규모의 양전인 경자양전(庚子量田)이 시행되었는데, 본래 의도한 전결수는 거의 확보되지 못하였다.

18세기 비총제(比總制)에 의한 전세 수취가 일반화되면서, 양전은 과세 기준에 대한 조사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자양전 이후 조선에서는 더 이상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시기 광무양전(光武量田) 때 한 번의 전국적 양전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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