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입위출(量入爲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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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수입을 기준으로 지출 경비를 맞추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둔 것 안에서 지출하고자 한 재정 운영의 원리.

개설

근대적 세입(歲入)과 세출(歲出) 예산안에 비견되는 조선시대의 문서는 공안(貢案)횡간(橫看)이었다. 『대전회통』「호전(戶典)」의 첫 항목에 기재된 경비 조항에 의하면, 『경국대전』 작성 당시 중앙의 경비는 횡간과 공안을 활용하였다.

1746년(영조 22) 『속대전』의 편찬 이후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참고로 활용한다[參用]는 조항이 추가되었고, 1785년(정조 9) 『대전통편』에 이르면 다시 『탁지정례』를 참고로 활용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조선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것은 양입위출의 원칙이었다. 양입위출과 대비되는 개념은 양출위입(量出爲入)이었다. 양입위출은 재정 수입을 기준으로 재정 지출을 맞추는 것이고, 양출위입은 재정 지출을 기준으로 재정 수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전자는 거둔 만큼 쓰는 것이고, 후자는 쓸 만큼 거두는 것을 뜻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것은 양입위출의 원칙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첫째, 확보된 조세의 수입에 따라 지출하는 것을 뜻하였다. 이는 국가가 백성에게 거둘 수 있는 재정 규모를 미리 예측하고 그에 맞춰 지출을 짜는 방식을 말하였다. 둘째, 거둔 세금이 부족하다고 해서 백성에게 추가로 세금을 더 거두는 첩징(疊徵)과 가징(加徵)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이었다. 양입위출과 양출위입은 재정 수입과 지출을 맞추어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양출위입은 재정 운영을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재정 지출과 수입의 균형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뿐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으로서의 재정 수입을 강조한 것이었다. 규정된 세입 이상을 수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양입위출은 현실에서 첩징과 가징의 금지를 뜻하였다. 이것은 심지어 인조 초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추진 당시에 이 법의 즉각적인 실시에 반대했던 김장생(金長生)도 요청한 사항이었다. 그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첩징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였다.

셋째, 조세의 수취 규모가 백성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낮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의미인 첩징이나 가징의 금지가 수취액의 고정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이 세 번째 의미는 고정된 세입의 실질적인 규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양입위출과 양출위입의 개념상에 약간의 혼란을 불러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이 성립될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유형원(柳馨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동법의 원칙을 양입위출이 아닌 양출위입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인식이 빚어진 이유는 대동법의 성립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공물변통론(貢物變通論)의 하나인 대동법이 또 다른 유력한 공물변통론이었던 공안개정론(貢案改正論)과 경쟁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공안개정론의 가장 중심적 주장은 공안의 개정을 통하여 공물과 진상, 특히 진상 액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작지의 결(結)당 수취 액수의 인하를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충청도대동사목』과 『전라도대동사목』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 이전의 정부의 공적 지출 규모가 축소되지는 않았다. 비록 공물과 진상 수취와 관련된 중간 과정의 불합리와 비리가 제거되기는 하였지만, 최종적으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이는 몫 자체가 줄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동법에서의 결당 수취 액수는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왕실과 중앙정부가 지출하던 몫을 계속해서 조달할 수 있을 만큼 수취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실제로 대동법의 윈칙은 지출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양출위입이었던 셈이다.

대동법과 공안개정론은 모두 양입위출을 재정 원칙으로 하였다. 중요한 점은 같은 원칙에 대하여 양자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대동법이 ‘입(入)’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공안개정론은 ‘출(出)’에 강조점을 두었다. 대동법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은 규정된 양을 한 번 거둔 후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동사목』의 많은 규정들은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걷지 않으려면 미리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지출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했다. 수취량을 객관화하기 위해서 세금을 경작지인 전결에 따라 부과해야 했고, 세금은 현물이 아닌 쌀·포 등 당시 화폐의 기능을 하던 물품으로 거두도록 법적으로 규정해야 했다. 반면에 공안개정론은 어공(御供)·진상·경각사(京各司)의 지출에 대해서 절약을 강조하였다.

대동법은 조선건국 이래의 재정 원칙인 양입위출의 원칙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변통의 모습을 취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천

대동법의 재정사(財政史)적 의미는 양입위출의 원리에서 ‘입(入)’의 객관적 수취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법적 강제성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토지에 준하여 결당 12두(斗)의 대동세를 거두되, 지역을 고려하여 쌀과 포목으로 일괄 수취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요컨대 공물 부과 기준으로서의 전결과 수취 단위로서의 미·포는 대동법이 작동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것은 양입위출이라는 규정과 결합해서만 그럴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탁지정례(度支定例)』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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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훈, 「조선시대 재무제도 연구」,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행정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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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변통론에서 포저(蒲渚) 조익(趙翼)의 위치와 역할」, 『대동문화연구』 7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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