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일기(藥房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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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의원(內醫院)에서 수행한 업무를 일자별로 기록한 일기.

개설

약방(藥房)은 내의원의 다른 이름이다.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건강관리를 담당하였다. 『약방일기(藥房日記)』는 내의원의 업무 일지에 해당된다. 왕에 대한 문안이나 문후(問候), 입진(入診) 기록을 비롯해 내의원 관원의 인사 상황 등을 기록하였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10권의 『약방일기』가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약방일기』가 언제부터 작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 내의원이 1443년(세종 25)에 내약방(內藥房)이 개칭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아(『세종실록』 25년 6월 15일) 이 이후의 어느 시기부터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왕과 왕실의 건강 상태는 왕조의 안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이를 담당하였던 내의원에서 왕과 왕실의 건강관리 및 몸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방일기』를 작성하였다.

서지 사항

현재 조선후기 헌종과 철종 연간에 작성된 『약방일기』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권수가 나누어지지 않은[不分卷] 10책으로 필사본이다. 장서각에는 『약방일기』 이외에도 고종 연간의 약방일기인 『춘추일기(春秋日記) 약방(藥房)』 18책이 소장되어 있어 참고된다.

구성/내용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따르면, 내의원의 기본적인 업무는 문안(問安)과 입진(入診), 수가(隨駕), 진어(進御) 등으로 규정되었다. 문안은 계사(啓辭)로 하는 문안으로 매 5일마다 행하도록 규정하였다. 내전에는 의녀가 문안하였다. 입진은 내의원에서 3명의 제조(提調)의관(醫官)이 입시하는데, 먼저 도제조가 문후(問候)하고, 진맥을 청하면 의관이 입진하였다. 수가는 왕의 거둥 시에 함께하는 것으로 제조 3명과 의관 5명이 수행하였다. 진어는 왕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것으로 국휼(國恤) 등이 있을 때는 인삼과 미음 등을 올리기도 하였다.

『약방일기』는 이 같은 내의원의 업무 수행과 관련하여 일자별로 내용을 기술하였다. 각 책별 기록 대상 시기를 보면, 1책은 1850년(철종 1), 2책은 1852년, 3책은 1853년, 4책은 1854년, 5책은 1856년, 6책은 1859년, 7책은 1860년, 8책은 1861년, 9책은 1863년, 10책은 1842년(헌종 8)이다.

현전하는 『약방일기』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날짜와 기후를 기록하고 이어서 업무 수행 내용을 기록하였다. 제조 등의 계사 문안과 이에 대한 답변, 그리고 이어서 대왕대비전나 왕대비전, 대비전에 대해서도 역시 문안을 올린 것과 이에 대한 답변을 기술하였다. 왕이 종묘나 산릉(山陵) 등에 거둥하는 날의 일기에는 내의원 소속으로 수행하는 인원수와 함께 특정 시점마다 왕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여 이를 기록하였으며, 진어하는 물품 등도 역시 기록하였다.

또한 입시해서 도제조가 왕에게 문후한 내용과 의관을 대령하여 입진하기를 청하는 기록, 의관이 진맥한 결과 등을 기록하였다. 왕의 진맥이 끝난 뒤에는 입진한 의관들에게 진맥 결과에 대한 상태를 묻기도 하는데 『약방일기』에는 그러한 내용도 수록되었다. 만약 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이에 상응하는 탕제를 올릴 것을 건의하거나 침 혹은 뜸 등으로 치료한다는 내용 역시 수록되었다. 이 밖에도 내의원 소속 제조의 체직(遞職)이나 인사, 의관의 차출과 관련된 상황이나 왕의 전교(傳敎)가 수록되었다.

이런 이유로 『약방일기』는 입진의 일반적인 본보기가 기록된 책으로 인정받았고(『정조실록』 6년 5월 27일), 특정 시점에서 왕의 몸 상태 및 이에 대한 대응 치료의 효능 등을 살피는 데 활용되었다(『인조실록』 26년 6월 29일), (『경종실록』 2년 8월 18일).

한편 『약방일기』는 영조대 『승정원일기』가 화재로 소실된 후 이를 개수(改修)할 때 주요 보완 자료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정선남, 「약방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