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櫻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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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의 열매.

개설

앵두는 5월의 제철 과실로서 왕실에서 종묘 천신, 각전 진상, 잔치음식, 하사품 등으로 주로 쓰였다. 앵두는 생으로 식용하는 일이 일반적이지만, 앵두편·앵두정과·앵두화채 등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원산지 및 유통

조선시대 왕실에서 쓰는 앵두는 특정 지방에서 공물로 진상하는 것이 아니라 장원서(掌苑署)에서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전향사일기(典享司日記)』에 따르면, 장원서에 종묘와 경모궁 천신에 올릴 앵두를 4월 30일까지 천진하도록 하였다. 『승정원일기』 1722년(경종 2) 5월 6일 기사에 의하면, 종묘 등에 천신할 앵두를 장원서에서 제때 올리지 않아 담당 관원들에게 죄를 물었다. 성종 때에는 앵두를 늦게 올린 것뿐만 아니라, 장원서에서 진상한 앵두의 품질이 사처(私處)에서 올린 것보다 떨어진다는 이유로 해당 관원이 심문을 당하였다(『성종실록』 19년 5월 2일). 행사직(行司直)정척(鄭陟)과 설성부수(雪城副守)이철정(李鐵丁)은 성종에게 앵두를 진상하고, 성의가 가상하다 하여 선물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 5년 6월 3일)(『성종실록』 25년 5월 13일).

왕에게 앵두를 바친 것은 관리들만이 아니었다. 세종 때에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후원(後苑)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서, 앵두가 익기를 기다렸다가 매년 세종에게 올렸고, 이를 맛본 세종이 매우 기뻐했다(『문종실록』 2년 5월 14일).

연원 및 용도

태종 때에 매달 시물(時物)을 종묘에 천신하도록 명했는데, 앵두는 보리·죽순·오이·살구와 함께 5월에 변(籩)에 담아 올리는 제철 산물이었다(『태종실록』 12년 8월 8일)[『세종실록』 오례 종묘천신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따르면, 단오를 즈음하여 종묘에 앵두를 천신하고 관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일반 백성 역시 이때 ‘앵두천신’이라 하여 사당에 앵두를 올렸다가 먹었다. 중종 때 앵두를 승정원·홍문관·예문관과 같은 관청에 하사한 사례가 있다(『중종실록』 7년 윤5월 3일).

제철인 5월에는 각전에 대한 물선(物膳)의 진상은 물론이고, 제향의 제수와 궁중연회, 관청과 관리에 대한 하사품으로 앵두가 쓰였다. 『전향사일기』에 따르면,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 5월 초5일 단오 물선으로 대전(大殿)에 앵두 6두를 진상하였다. 『승정원일기』 1729년(영조 5) 5월 16일의 기사를 보면, 5월에 제사를 지내면서 원래는 제물로 곶감을 써야 하지만 곶감이 벌레 먹고 상해 곶감 대신 앵두를 제수로 봉진하였다.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에 의하면, 1901년(고종 5) 5월 13일에 열린 진찬 연회에서 앵두를 1척 3촌의 높이로 한 그릇에 고여서 상에 올렸다.

조선시대에 앵두를 주재료로 한 음식 중에 앵두정과는 『산가요록(山家要錄)』, 『산림경제(山林經濟)』, 『박해통고(博海通攷)』, 『해동농서(海東農書)』, 『고사신서(攷事新書)』 등에 만드는 법이 나온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앵두를 꿀과 섞은 다음 뭉그러질 때까지 끓여서 엿 같은 상태가 되도록 졸이는 게 공통적이다. 『규합총서(閨閤叢書)』와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에 나오는 앵두편은 씨를 없앤 앵두를 꿀과 섞어 조리는 것은 같으나, 녹말을 살짝 넣어 굳힌 후 썰어 먹는 게 다르다. 『시의전서』에 따르면, 앵두화채는 잘 익은 좋은 앵두를 골라 씨를 발라내고 꿀에 재운 후 꿀물을 달게 타고 잣을 띄워 만들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사신서(攷事新書)』
  • 『규합총서(閨閤叢書)』
  • 『박해통고(博海通攷)』
  • 『산가요록(山家要錄)』
  • 『산림경제(山林經濟)』
  • 『시의전서(是議全書)』
  •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
  • 『전향사일기(典享司日記)』
  • 『해동농서(海東農書)』
  • 『해동죽지(海東竹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