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막이(度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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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액막이 |
한글표제 | 액막이 |
한자표제 | [度厄] |
관련어 | 기양의례(祈禳儀禮), 비유교(非儒敎), 액(厄) |
분야 | 문화/종교/민간신앙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집필자 | 이필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액막이([度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2년 7월 26일, 『태종실록』 4년 2월 20일, 『태종실록』 13년 5월 1일, 『태종실록』 10년 9월 17일, 『연산군일기』 11년 6월 27일, 『태종실록』 16년 2월 25일, 『성종실록』 9년 11월 30일 |
인간의 삶에 앞으로 닥칠 나쁜 운수를 미리 막는 행위.
개설
조선 왕조는 건국과 함께 유교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경제·사회 등 다방면으로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 고난, 불행 등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 직면하거나 미래에 불행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액막이[度厄]를 하였다. 곧 당대 사람들은 개인이나 국가에 불행을 안겨다 주는 원인을 액(厄)으로 상정하였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액을 물리치려고 하였다.
조선 왕조 건국 초기에 액막이는 고려시대의 문화 관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불교·도교·무속 등의 비유교적인 의례로 행해졌다. 그리고 유교 사회로의 성숙, 의학의 발달 등으로 인해 액막이의 방식도 점차 변모하였다. 비유교적 의례 가운데 일부는 그 기능을 다하여 소멸하거나 일부는 유교식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는 존속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액막이에 대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10여 건 확인된다. 액막이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에 불행을 안겨주는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미리 막는 것이다. 이는 신에게 제사하여 나쁜 기운을 없애는 기양의례(祈禳儀禮)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왕조는 유교 사회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개인에게 닥치는 질병, 고난, 불행 등의 액을 예방하기 위해 불교·도교·무속 등의 비유교적인 의례를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국가 차원에서는 특히 전염병의 유행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전염병은 전 국토와 백성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것으로,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였다. 당대에는 귀신이 질병을 옮기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대접받지 못하는 귀신에 대한 제의가 액막이의 방편으로 행해졌다. 실제 1456년(세조 2)에 비운에 죽은 영혼의 액막이를 위해 불교식 수륙재(水陸齋)를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지내게 하였다(『세조실록』 2년 7월 26일). 이 의례는 관인 유자들의 지속적인 반대에 불구하고 시행되다가 결국 성종대 여제(厲祭)로 대체되었다.
한편 국가적으로 액운이나 재앙을 당하면 불교식 수륙재 이외에도 도교식 초제(醮祭)가 행해지기도 하였다(『태종실록』 4년 2월 20일). 왕실의 경우에도 왕실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액막이를 하였다. 특히 왕실과 관련한 액막이 가운데 빈번한 것은 왕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다. 이어(移御)는 왕에게 액이 들거나 태종의 경우처럼 부인과의 금슬이 좋지 않는 개인적인 일상생활의 불협화음까지도 그 원인이 되었다(『태종실록』 13년 5월 1일). 이어는 대개 관상감 복자들의 점괘를 통해 옮겨갈 방향이나 거처가 결정되었다(『태종실록』 10년 9월 17일).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환궁을 하였으며, 이 기간에는 몸과 마음을 조심하였다. 이어는 고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사가(私家)로 옮겼으며, 그 이후에는 궁궐 간의 이어로 변화되었다.
궁궐뿐만 아니라 종실(宗室)의 경우에도 액막이를 위해 거처를 옮기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연산군대에 남천군 이쟁(李崢)은 자신의 집 뒷산에 초가집을 짓고 거처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27일).
민간에서는 액막이의 방편으로 맹승(盲僧)을 불러 독경(讀經)을 하거나(『태종실록』 16년 2월 25일), 무당집에 가서 굿을 하였다. 한편 관인 유자들은 무속식 의례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성종대 성현(成俔)은 부녀자들이 무당집에 출입하면서 액막이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교화를 주장하였다(『성종실록』 9년 11월 30일).
이처럼 액막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국가나 개인에게 재난이나 질병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행위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는 비유교적인 다양한 방식들이 행해졌지만, 유교 지배 이념의 확산에 따라 일부는 소멸하거나 점차 유교식으로 대체되어갔다.
의의
액막이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관계없이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없는 존재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문화 장치였다. 아울러 조선 왕조에서는 신분의 존귀를 떠나 다양한 방식으로 액막이를 하였으며, 비유교적인 방식들은 유교 이념의 확산에 따라 점차 유교식으로 대체되거나 소멸되어갔다.
참고문헌
- 김효경, 「조선시대의 기양의례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