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학(樂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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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악 기관의 하나.

개설

조선초기에 궁중음악과 관련된 행정 지원과 음악 이론 연구를 담당하였다. 악학(樂學)에 소속된 관료들이 음악의 원리를 연구하고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여, 궁중음악의 전통을 확립하고 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악학은 고려말인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예학(禮學) 곧 유학(儒學)·병학(兵學) 곧 무학(武學)·율학(律學)·자학(字學)·의학(醫學)·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이학(吏學)·역학(譯學)·산학(算學)과 함께 십학(十學)의 하나로 처음 설치되었다가 조선 건국 이후 1406년(태종 6)에 재정립되었다(『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유교를 바탕으로 했던 조선시대에는 예악사상(禮樂思想)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와 악 중에서 악을 구현하기 위한 기관이 악학이었으므로, 악학은 건국 초부터 주목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태종대부터 악학에 제조(提調)를 두었다(『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태종실록』 12년 10월 17일). 또한 악학 제조를 명나라로 유학 보내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태종실록』 12년 10월 26일) 전문성을 강화하려 하였다.

세종대에는 음악 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제거(提擧)와 별좌(別坐)까지 더 설치하여 악학 소속의 관리가 다양해지고 그 수도 늘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제조·제거·별좌라는 명칭을 지닌 악학의 관원들은 모두 과거 급제자였으며, 직무 수행 능력 향상을 위해 1년에 네 번 시험을 치렀다. 시험 결과에 따라 등급화하고 차별 대우를 하였다(『태종실록』 16년 3월 29일), (『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악학에서 활동했던 관리 중 유명한 인물로는 박연(朴堧)이 있다. 그는 세종대에 악학 별좌와 악학 제조를 역임하였고 아악 정비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문헌통고(文獻通考)』, 진양의 『악서(樂書)』, 『통전(通典)』과 같은 중국 음악 서적 편찬을 건의하였으며, 악기(樂器)에 대한 그림과 설명을 책으로 만들고 악보(樂譜)도 제작하여 보관할 수 있도록 힘썼다(『세종실록』 7년 2월 24일). 또한 악기를 고증하고(『세종실록』 8년 1월 10일), 『주례(周禮)』 연구를 통해 제례악(祭禮樂)의 정정 근거를 마련하였으며(『세종실록』 8년 4월 25일), 악기 제작을 감독하고 율관(律管)을 만들었으며(『세종실록』 9년 5월 15일), 의례에 적합한 악곡을 제시하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7일). 박연은 아악 정비를 위한 각종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는 그가 악학에 소속된 관리로서 역할을 해낸 것이므로, 악학에서 담당했던 일의 범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재랑(齋郞)의 임용 조건 건의(『세종실록』 8년 3월 1일), 율려(律呂) 연구(『세종실록』 8년 4월 25일), 악기 제작 건의(『세종실록』 11년 2월 8일), 악인의 연습 독려와 시험 관리(『세종실록』 14년 9월 5일), (『세종실록』 16년 1월 24일), 악기 배치 조정(『세종실록』 14년 10월 18일), 악인의 복식 고증(『세종실록』 14년 12월 19일) 등에 대해서도 악학에서 관여하였다.

즉 악학의 핵심 업무는 음악 이론 연구와 악인의 행정 관리로 압축된다. 그러나 궁중음악과 악인에 관련된 업무도 다양하게 수행하였다. 악학은 조선초기 궁중음악 정비의 근거와 틀을 뒷받침해준 음악 기관이었다.

변천

악학은 고려말에 처음 등장하였고, 조선이 건국된 후 1406년(태종 6)에 재정립되었다. 1457년(세조 3)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관습도감(慣習都監)과 통폐합되어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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