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청직령(鴉靑直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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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청색의 직령(直領).

개설

직령은 깃의 모양이 직선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고, 아청직령은 아청색 직령을 말한다. 직령은 관복의 받침옷으로 입거나 겉옷으로 입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직령은 1387년(고려 우왕 13) 6월에 관복을 개정할 때 처음 나타났으며,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경국대전(經國大典)』·『발기[件記]』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관복 개정 때 직령을 입을 수 있었던 계급은 서인과 천인 계급이었다, 고정립을 쓰고 직령을 입었으며 사대(絲帶)와 전대(戰帶)를 매었다.

조선시대에는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직령을 계속 입었는데, 서민부터 왕까지 두루 이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관례를 남자 나이 15~20세에 치렀으며, 그 절차는 초가례·재가례·삼가례로 이루어졌다. 직령은 초가례를 행하기 전에 방에서 처음 나올 때 입는 옷[初出之服]이다. 왕세자, 왕세손의 관례 때 방에서 처음 나올 때 직령을 입은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왕세자의 관례는 1522년(중종 17) 10월에 처음 시행된 기록이 있다(『중종실록』 17년 10월 19일). 1670년(현종 11) 숙종이 왕세자였을 때, 1727년(영조 3) 사도세자가 왕세자였을 때, 1761년(영조 37) 정조가 왕세손이었을 때에 나온다. 이때 관례 시 아청직령을 입었다. 관례 시 의식 절차는 중국의 제도를 따랐지만, 의복은 당시 통용되었던 직령을 입었다. 그러나 1819년(순조 19) 헌종의 관례 이후에는 도포를 입었다.

현종대에 왕세자 관례 시 복장과 교서에 대한 『오례의(五禮儀)』의 절차를 논의하는 중에 왕세자가 관례에 처음 입고 나올 시복(時服)을 정할 때 “시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평소에 입는 옷이니, 흑단령(黑團領)은 알맞은 옷이 아닌 듯하다. 일찍이 신묘년에 나는 아청직령에다 조대(絛帶)를 띤 복장을 처음 입고 나오는 옷으로 삼았었다.”(『현종실록』 11년 2월 12일)라고 하였고, “왕세자의 관례 시 아청직령·조대를 처음 나올 때의 차림으로 하는 것이 전례입니다.”(『영조실록』 3년 8월 20일)라고 하였다. 예조에서 왕세손의 관례 시 복장에 관하여 아뢴 것을 보면 “왕세손의 관례 시 아청직령과 조대를 처음 나갈 때의 옷으로 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영조실록』 37년 2월 26일)고 한 것을 통해 볼 때, 아청직령을 왕세자 또는 왕세손의 관례복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전례에 따라 관례복 차림을 쌍계(雙髻)·옥잠(玉簪)·아청직령·조대(縧帶)로 마련하였다(『정조실록』 24년 1월 13일).

형태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직령의 무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며 무 옆이 트여 있다. 조선초기에는 소매가 좁으며, 옷깃은 네모난 목판깃이고, 사각형의 무(武)가 달려 있었다. 중기에는 소매가 넓어지고, 옷깃은 칼깃으로 되고, 무는 넓고 무의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뒤로 젖혀 입었다. 후기에는 소매는 도포와 같이 두리소매가 되었고, 깃 궁둥이가 완만하게 되었으며,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져서 길에 무의 위쪽을 실로 꿰매 고정시켰다. 이러한 직령의 형태 변화는 단령의 형태 변화와 같다.

용도

왕세자 또는 왕세손의 관례복에 쓰였다.

참고문헌

  • 고영진, 『조선중기예학사상사』, 한길사, 1995.
  • 김미자, 「직령에 관한 연구」, 『복식』5호 , 1981.
  • 이주영, 「조선시대 직령(直領)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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