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문(神佑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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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정전의 차비문(差備門).

개설

차비문이란 편전, 중궁전 등 왕과 왕비가 머무는 주된 공간의 앞에 놓인 문을 말한다. 말 그대로 왕의 일상이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왕의 각종 행위를 시위하는 인원들이 편전 앞 행각에 대기하며 준비하는 공간이다. 신우문(神佑門)은 선정문과 함께 창덕궁 편전의 차비문이었다. 신우문 안에는 오정고(午正鼓)와 차비고(差備鼓)라 불리는 북이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신우문은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 영역에 있는 문이다. 선정전의 영역에는 정문인 선정문을 비롯해 ‘口’ 자의 행각이 전각을 둘러싸는데 이 행각뿐만 아니라 행각의 전면에 또 한 겹의 마당과 행각이 둘러쳐졌다. 선정전 중문의 전면에 놓인 바깥 행각은 다시 두 부분의 마당으로 나뉘어져 있어 선정전과 같은 축선 상의 외행각에 선정문이 들어있다. 외행각의 동쪽에 다시 작은 마당과 행각이 둘러쳐졌는데 이곳을 출입하는 문이 신우문이다.

변천 및 현황

창덕궁이 건립되던 때에 신우문도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의 이름은 융우문(隆佑門)이었지만 1497년(연산군 3)에 신우문이라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선정전의 어문(御門)이던 융례문은 돈례문으로 고치라 하였고, 융경문은 희경문으로 고치라 하였는데, 돈례문은 선정전의 어문으로 중문을 말하지만, 희경문은 어느 문인지 확실하지 않다(『연산군일기』 3년 1월 9일).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대에 복구하였고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5년(인조 23)에 복구하였다. 이후 1862년(철종 13) 10월 12일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언제 복원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00년대 초까지 존재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어 사라졌다.

형태

신우문은 담장 사이에 있는 문으로 지형의 고저차를 극복하기 위해 높이가 있는 기단 위에 놓였다. 때문에 계단을 올라가 문으로 출입하게 되었는데 정면·측면 모두 한 칸 규모의 사주문(四柱門)이고,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맞배지붕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신우문 안에는 오정고와 차비고라 하는 북이 있었는데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자 하는 백성들이 간혹 돈화문을 통해 비교적 깊은 곳에 자리한 신우문까지 들어와 북을 치며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문을 지키는 낭청과 수문장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감시를 게을리한 탓에 백성이 함부로 궁궐에 난입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