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진(薪島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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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용천부 신도에 설치한 진.

개설

정조대 신도는 용천부(龍川府) 미곶진(彌串鎭)에 속했다. 방수(防守)가 없었고 고기잡이의 이로움이 여러 도 가운데 으뜸이었다. 1807년(순조 7) 신도에 진(鎭)을 설치하고, 미곶첨사(彌串僉使)를 신도첨사(薪島僉使)로 개칭했다(『순조실록』 7년 12월 22일).

위치 및 용도

신도는 이도(李島) 동쪽에 있으며 육지와 10리(약 4㎞) 떨어져 있었다. 1786년(정조 10) 신도는 용천부 미곶진에 속했는데, 그곳과의 거리가 60리였다(『정조실록』 10년 3월 6일). 신도는 조선에 속해 있었지만, 길은 중국과 매우 가까웠다. 또 읍의 소재지와 1백 리 떨어져 있었다. 신도에는 각 고을의 고기잡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 및 목자(牧子) 등 많은 사람이 살았다. 특히 중국과 가까운 지리 탓인지 1530년(중종 25) 당시 신도에는 거주민이 거의 중국 사람이라 할 정도였다(『중종실록』 25년 3월 10일).

신도에는 원래 방어시설이 없는 데다, 해양자원은 풍부하여 주변 야인들이 법을 어겨가며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신도에 오면 장막을 치고 생활하며 물고기를 잡았다. 조선 조정은 이와 같은 일을 제어하고 관리하고자 1807년에 신도에 진을 설치하고, 미곶첨사를 신도첨사로 개칭하면서 그대로 변지(邊地)의 이력(履歷)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법을 어기고 몰래 장사를 하거나 국경을 넘어온 자들에 대해서는 해당 율을 적용하여 죄를 물었다. 1808년에 해서수영(海西水營)에서 관장하는 방선(防船) 1척과 추포선(追捕船)·협선(挾船) 각 5척을 신도진에 나눠 배치하였다. 또한 신도진의 지휘와 인사를 감영에서 거행하도록 했다.

변천 및 현황

1791년(정조 15) 신도에는 고기잡이하는 호인(胡人)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쫓아내면 금방 다시 돌아오곤 했다. 1872년(고종 9) 2월 신도진에 별포수(別砲手) 10명을 설치했다(『고종실록』 9년 2월 28일). 고종대 신도진에는 중국 배로 들여와 파는 불법적인 물건들이 넘쳐났다. 때문에 그것을 불태우기도 했다(『고종실록』 10년 12월 4일).

관련사건 및 일화

1812년(순조 12) 5월 추국 죄인 우군칙(禹君則) 등이 사형되었다. 적도들은 홍경래·우군칙을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자칭 대원수(大元帥)라고 하였으며, 신도를 근거지로 삼아 무기와 화폐를 장만하고 거사를 일으킨 뒤 일곱 군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동쪽으로 올라오려다가 송림(松林)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정주성으로 달아났다. 성이 함락된 뒤 홍경래 일당을 모두 모반 대역으로 사형에 처하였다. 이때 신도첨사유재하(柳載河)가 적에게 항복했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이 지극히 흉참(凶慘)한지라 모반 대역으로 결안하여 정법하고, 홍경래·이희저의 머리와 함께 군민(軍民)에게 두루 보이고, 거리에 사흘 동안 걸어 놓은 뒤 팔방에 전해 보게 하였다(『순조실록』 12년 5월 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