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지설(臣强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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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현종 12) 2월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이남(李柟) 등의 보고를 통해서 전달된 조선은 신하가 강하다는 청나라의 설.

개설

주약신강지설(主弱臣强之說)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1671년 2월 귀국하던 동지사(冬至使)가 청나라 황제의 신강지설을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이후 이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고, 1673년(현종 14)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상소를 올려 이 소문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강지설을 둘러싼 논란은 이후 숙종대 정국의 변동과 함께 그 결정이 수시로 번복되었고, 영조와 정조대에도 사건의 중심에 있던 오시수(吳始壽)의 신원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1671년 2월 당시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정사(正使) 이남(李柟)과 부사(副使) 정익(鄭榏) 등이 귀국하면서 산해관(山海關)에서 청국에서의 상황을 먼저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서 이남 등은 청나라의 건청궁(乾淸宮)에서 황제를 만난 사실을 말하면서, 황제가 조선의 백성이 빈궁한 이유는 신하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말을 돌아가 조선 왕에게 전달하라고 했다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2년 2월 20일). 이에 대하여 이남 등은 백성이 곤궁한 이유는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변명한 사실도 아울러 보고하였다.

동지사의 보고를 접한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현종은 이 발언이 후일에 혹시라도 파장이 없을까를 고민하였으나, 자리에 참석하였던 허적(許積)은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고, 지중추부사유혁연(柳赫然)은 이런 허적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반면 병조판서김좌명(金佐明)은 심각하게 우려의 뜻을 전달하였다(『현종실록』 12년 2월 21일).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어 몇 개월 뒤인 8월에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는데, 사은사를 보내 이를 해명하는 안이 결정되었다(『현종실록』 12년 8월 8일).

이 문제는 한동안 잠잠해 있다가 1673년(현종 14) 9월 26일 다시 불거졌다. 행판중추부사송시열(宋時烈)이 상소를 올려, 당시에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은 신강지설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에 있었던 민신(閔愼)의 대복사(代服事)로 인하여 송시열이 공격당하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었다(『현종실록』 14년 9월 26일). 이를 통해 보면 신강지설에 대해 서인 측에서는 청나라 황제의 지적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서인측 김창협(金昌協)은 신강지설이 송시열 개인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사류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변천

현종대에 더 이상 논의가 없던 신강지설은 숙종 즉위 초부터 다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즉 1675년(숙종 1) 청나라에서 승하한 현종의 상에 사신을 파견해 조문하였는데, 이때 파견된 청나라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 파견되었던 원접사(遠接使)오시수(吳始壽)가 조정에 보고하면서 다시 알려졌다(『숙종실록』 1년 3월 5일). 오시수는 앞서 현종대에 신강지설을 전한 이남의 외종형이었다. 물론 이에 대하여 황해감사윤계(尹堦)는 상소를 올려 오시수가 신강지설과 같은 의견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숙종실록』 1년 3월 28일).

오시수의 발언으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역관인 박정신(朴廷藎)을 비롯해 안일신(安日新)·변이보(卞爾輔) 등이 조사를 받았다. 또한 허적은 장효례를 통해서 신강지설을 말하였는지 여부를 물었고, 결국 윤계가 허위 보고를 하였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숙종실록』 1년 5월 24일).

신강지설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에도 다시 치열하게 논의되었다. 숙종은 1680년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익현(沈益顯)과 신정(申晸)·목임유(睦林儒) 등에게 그 진상을 확인하도록 지시하였다(『숙종실록』 6년 6월 10일). 그런데 사신이 환국하기 전 마침 청나라 칙사의 역관으로 파견된 이일선(李日善)을 탐문해서 청나라 황제의 발언은 “그대 나라의 신하들이 착하지 못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숙종실록』 6년 윤8월 19일). 앞서의 신강지설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진술이었다. 심익현 등 역시 귀국해서는 비슷한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신강지설은 조작된 것이며, 그 책임자로 오시수가 지목되었다. 마침 경신환국으로 유배 생활을 하던 오시수는 중앙으로 불려와 조사를 받았다. 오시수는 역관들이 말을 바꾼 것이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신강지설을 오시수 등이 송시열을 위해(危害)하기 위하여 만든 논리라고 하였으며, 결국 김수항 등은 오시수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681년(숙종 7) 6월 오시수는 사사되었다(『숙종실록』 7년 6월 12일).

신강지설은 또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기사환국 이후에 다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오시수가 역관의 말을 전한 것뿐이라고 하면서 오시수의 책임론을 해명하였고, 결국 오시수의 관직 복직이 허용되었다(『숙종실록』 15년 2월 10일). 한편 사건과 관련된 역관의 처벌이 주장되었으나, 이들의 처벌에 대해서 숙종은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한 남인계의 비난이 이어졌다(『숙종실록』 15년 6월 2일)(『숙종실록』 15년 6월 29일)(『숙종실록』 15년 10월 20일).

기사환국 이후 남인 주도 하에 취해진 오시수와 신강지설에 대한 판정은 정치적이었고, 따라서 정국의 변화에 따라 다시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 그 결과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 문제가 불거졌다. 오시수는 갑술환국 직후인 1694년 5월 13일 관직이 추탈되었다(『숙종실록』 20년 5월 13일). 이어서 병조참의김창집(金昌集)은 상소를 올려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하면서 오시수의 신강지설은 송시열을 모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체 사류(士類)를 해치기 위한 무함(誣陷)이라고 하였다(『숙종실록』 20년 5월 19일). 이어서 화를 당한 역관에 대한 신원도 이루어져, 귀양 중이던 김기문(金起門)과 이미 사망한 변이보에 대해서는 관직을 회복시키라는 조치가 내려졌다(『숙종실록』 20년 10월 8일).

오시수에 대한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43년(영조 19) 5월에는 오시수의 손자 오성운(吳星運)이 신문고를 쳐서 할아버지의 원통함을 하소연한 바가 있다. 이때 관련된 윤계의 손자인 부사직 윤급(尹汲)(『영조실록』 19년 5월 26일)과 김수항의 손자인 사옹원 첨정김치겸(金致謙)이 상소를 올려(『영조실록』19년 6월 3일) 조부들과 관련된 오성운의 주장이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1783년(정조 7)에도 오시수의 후손인 오석충(吳錫忠)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꽹과리를 치는 격쟁(擊錚)을 통하여 역시 오시수의 신원을 주장한 바 있다. 오석충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격쟁을 한 것 같다(『정조실록』 8년 8월 3일).

이에 대하여 정조는 관련 사실을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고(『정조실록』 7년 1월 16일), 이에 대해 신중론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일부에서는 오시수의 일로 격쟁을 한 자들을 귀양을 보내자고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정조실록』 7년 3월 25일). 그러나 해가 바뀐 1784년(정조 8) 8월에 오시수는 관직이 복직되었다(『정조실록』 8년 8월 9일). 오시수의 복직에는 채제공(蔡濟恭)의 역할이 주효하였다. 채제공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심양에 갔다가 신강지설이 자세히 기록된 청나라 사람의 문헌을 구하였는데, 문헌에는 신강지설이 오시수가 가탁(假託)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를 기회로 오시수의 관직이 복직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농암집(農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배우성, 「숙종대 초반 신강설(臣强說)과 그 정치적 파장」,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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