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화문(崇化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창경궁 문정전의 외삼문.

개설

창경궁의 문정전은 조선 왕조 내내 상·장례 공간으로 가장 많이 쓰인 공간이다. 빈전(殯殿)으로 한 번, 혼전(魂殿)으로 17번 전용되어 창경궁의 편전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상·장례를 설행하는 장소로 굳어졌다고 해도 될 정도다. 왕실에 흉사가 일어나고 혼전을 꾸리면 그때부터는 혼전의 이름을 따로 정하여 부르는데, 예를 들면 효령전, 효소전, 영사전, 휘령전 등이다. 숭화문(崇化門)은 문정전 영역의 외행각에 있어 바깥문이라 불렸는데, 서쪽의 문정문과 문정전까지의 동선이 복도라고도 부르는 천랑으로 연결되어 있어 혼전의 특징적인 건축 형태를 보여준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동쪽을 향해 서 있다. 창경궁 안의 모든 건물이 다 동쪽을 향한 것은 아니고 핵심이 되는 주요 건물, 즉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 명정전과 그 정문인 명정문, 숭문당, 경춘전 등의 전각이 동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문정전은 명정전의 남쪽에 놓여 남쪽을 바라보는데 정문인 문정문은 동쪽에 놓여 문정전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한 번 꺾이게 된다. 문정전의 행각은 명정전의 행각과 교차하여 연결되며 남쪽과 동쪽 두 곳의 마당이 문정전 권역이다. 동쪽의 너른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내·외 두 겹의 동행각을 갖추었는데, 두 겹의 행각 중 외행각에 숭화문을 설치하였다. 숭화문의 앞뒤로 천랑이 놓였고, 천랑은 어도를 따라 문정문으로, 북쪽으로 한 번 꺾여 다시 문정전으로 연결되었다. 천랑은 상장례를 설행하는 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다.

변천 및 현황

숭화문은 성종대에 창경궁이 창건될 때 함께 조성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광해군대에 이르러 창경궁이 복원되면서 함께 복원되었다가 다시 일제강점기에 문정전 영역이 훼철되면서 사라졌다. 1986년부터 창경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문정전과 문정문은 복원되었으나 숭화문은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행각솟을삼문이다. 삼문의 중앙문이 천랑과 연결되었고, 각각 주칠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맞배지붕을 이었고, 용마루 끝에 취두를 얹어 장식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57년(영조 33) 11월 동짓달의 추운 밤에 상복을 입은 영조가 당시 인원왕후의 혼전이던 효소전의 바깥문인 숭화문 앞 맨땅에 엎드려 곡을 하였다. 그 뒤에는 동궁이었던 사도세자 역시 상복을 입고 엎드려 있었다. 이에 앞서 동궁에게 노하였던 영조는 숭화문 밖에서 재전(齋殿)으로 들어가 갑자기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버티자 동궁을 불러 엄하게 다그쳤다. 동궁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슬피 울었고 왕의 호통은 계속되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평소 영조의 엄한 훈육 때문에 동궁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병이 날 지경이니 자애롭게 훈계하기를 한목소리로 청하였다. 동궁이 왕의 앞에서 물러 나왔고 뜰로 내려가다 기절하여 맥이 통하지 않았다. 세자에게 청심환을 먹이고 가교를 태워 내전으로 들어갔다(『영조실록』 33년 11월 11일). 후에 다시 휘령전이 된 이곳에서 사도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혀 숨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은기·김상태·장헌덕, 「조선시대 혼전공간의 구성에 관한 연구」, 『문화재』 통권 58호,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