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문(崇政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

개설

숭정문(崇政門)은 경희궁 정전의 정문인 만큼 공적인 사용 빈도가 높은 문이었다. 형태 또한 궁궐 안에 있는 어떤 문보다 아름답고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 부속된 정문이 근정문, 인정문, 명정문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문 또한 정전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고 액호의 가운데에 정치한다는 뜻의 ‘정(政)’ 자가 들어있다. ‘숭정(崇政)’에는 정사를 드높인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어 이 공간에 서면 나라를 다스릴 때 겸손한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면려가 담겨있다. 이 문에서 경종과 정조·헌종이 즉위하였다.

위치 및 용도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쪽 끝에 있었다. 궁궐은 전체적으로 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남쪽을 바라보고 동서로 길게 놓였다. 경희궁을 동서로 길게 두른 궁장에 맞추어 문의 위치를 설명하면 동쪽 궁장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흥화문의 북쪽으로 역시 동쪽 궁장에 흥원문이 나란히 놓여 흥화문과 마찬가지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궁장의 남쪽에는 개양문이 있고, 서쪽에는 숭의문이 있고, 북쪽 궁장에는 무덕문이 있다.

궁궐 정문인 흥화문에서 정전 정문인 숭정문까지의 동선은 같은 축선 상에 놓인 것이 아니라 거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움직여 간 다음, 북쪽으로 한 번 꺾이는 배치의 형태를 하고 있다. 즉 흥화문에서 어도를 따라 서쪽으로 쭉 올라가면 어도가 북쪽으로 꺾이며 박석을 깔아놓은 넓은 월대가 경사진 지형 위에 놓여있다. 그 월대 위에 숭정문이 있는데, 숭정전과 숭정전 마당을 둘러싼 남쪽 행각에 들어있다. 숭정전 영역을 두르는 행각은 방과 월랑이 혼합된 형태로 경사지를 극복하기 위해 동북쪽의 행각은 몇 개의 층을 이루었다.

동행각에는 여춘문이 있고, 서행각에는 의추문이 있고, 정전 뒤편 북쪽 행각에는 자정문이 있다. 자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이어 행각으로 두른 마당이 다시 나오고 그 안에 숭정전의 후전이며 편전인 자정전이 있다. 숭정전의 행각에는 예문관·무예청·선전관청·서방색·내삼청·향실, 그리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방이 있었다.

숭정문에서는 중요한 행사를 많이 했는데 왕의 즉위식, 왕과 신하가 대면하여 조회하는 조참, 죄인의 국문, 과거에 합격한 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국가 의례 설행 등 많은 의례가 일어났다.

변천 및 현황

광해군 당시에 창건된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이라는 이름이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 12월 이전에는 경덕궁의 역사가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전인 숭정전은 그 한 해 전인 1619년(광해군 11) 9월에 대부분 완공되었던 것 같다. 주변 행각과 부속 시설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마무리 공사를 1년 넘게 한 후에 전체적인 마무리가 이루어졌다. 숭정문은 1619년 9월 즈음 숭정전과 함께 이미 건설되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광해군일기』 11년 9월 1일).

광해군대에는 경희궁에 끝내 이어하지 못했고, 왕위를 빼앗은 인조가 가장 오래도록 시어처로 삼았는데 23년여를 이 궁궐에서 생활했다. 영조도 비교적 오래 머물러 10여 년을 임어하였지만 다른 왕대에는 고작해야 1, 2년을 거처하고 창덕궁으로 환어하는 그야말로 이궁의 역할에 머물렀다. 따라서 숭정문의 역할도 인조와 영조대에 집중하여 나타난다.

고종대에 와서는 정전을 비롯한 중요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철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이 모욕에 가까운 수난을 당했다. 1889년(고종 26)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했고, 1902년(광무 6)에 겨우 보수공사를 하여 명맥을 지탱하던 행각과 문은 1908년(융희 2)에 일제에 의해 헐렸고 이후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울 안 궁궐들의 복원 계획을 시작했고, 경희궁은 1990년에 ‘숭정문지 및 남회랑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0년에는 숭정전이, 1991년에는 숭정문이, 1993~1994년에는 숭정전과 숭정문을 잇는 행각이 복원되어 비록 일부의 흔적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경희궁의 명맥이 살아나 오늘에 이른다.

형태

「서궐도안」에서 보이는 숭정문은 경사지를 극복하기 위해 박석을 깐 여러 단의 앞마당을 거쳐 두 단의 월대 위에 놓여있다. 상·하 월대를 오르기 위한 3부분으로 나뉜 계단이 전면에 놓였고, 상월대 위에 다시 기단을 두어 행각이 배치되었으며, 그 중심에 평삼문 형식의 숭정문이 놓였다.

현재 복원된 숭정문은 「서궐도안」에 따라 고증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3칸의 문 앞에는 각각 원기둥이 놓여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각 3칸의 문은 비슷한 폭으로 구성되었다. 전면 두 단의 월대 중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계단에는 답도가 마련된 것이 「서궐도안」과 다른 점이다.

문에는 주칠을 한 2짝의 판장문이 설치되었고, 다포식의 공포가 지붕을 받쳤다. 천장은 서까래의 구조가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문 인방 위에는 안상의 모양대로 풍혈을 뚫은 6개의 궁판을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홍살을 얹었다. 가구의 부재들은 모로 단청으로 멋을 내어 정전문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로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의 끝에는 용두가, 추녀마루 위에는 5개씩의 잡상이 올라앉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89년 9월 14일 새벽 3~5시에 숭정문에서 불이 나 좌우 행각 40칸을 모두 태웠다. 불은 동쪽 행각의 양잠하는 곳에서 일어나 서쪽 월랑까지 번졌다(『고종실록』 26년 9월 14일). 불이 난 원인 중 하나는 입직위장이 태만했던 때문이라고 엄중히 처벌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홍식, 「숭정전지의 발굴결과와 앞으로의 과제:경희궁지의 역사적 의의와 보존방향」, 『건축역사연구』, v. 1, n. 1, 1992~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