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덕문(崇德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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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경희궁·창덕궁 3개 궁궐의 동궁 권역에 있는 문.

개설

숭덕문(崇德門)은 경복궁·경희궁·창덕궁에 모두 있는 문이다. 3개 궁궐 모두 동궁의 권역에 있는 것은 ‘숭덕(崇德)’이라는 의미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풀이하면 ‘덕을 높임, 또는 덕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숭덕문의 액호를 지을 때 『서경』에서 그 뜻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은왕의 원자야 옛날을 상고하여 덕이 있는 이를 높이고 어짊을 닮은 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여 선왕을 계승해서 예물을 닦아 왕가에 손님이 되게 하노니 나라와 함께 아름다워 영세토록 무궁하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숭덕의 어원을 만든 문장으로 왕이 세자에게 주는 교훈과 같은 뜻을 담았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숭덕문은 계조당에서 북쪽 동궁의 정당인 자선당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 있다. 인정전을 두르는 행각과 동궁에 예속된 관원들의 처소인 통장청·오상방·원역처소 등이 있는 행각을 담장으로 막아 자선당으로 들어가는 동선을 분리하였는데 그 담장의 사이에 있는 문이다.

경희궁의 숭덕문은 경현당의 북쪽 담장에 있는 문인데 경현당은 동궁의 처소로 경서를 읽고 하례를 받는 정당이다. 경현당의 정문은 숭현문이고 동서 행각의 사이에 협화문·만상문·청화문·통현문이 있었다.

창덕궁의 숭덕문도 동궁의 정당인 중희당 앞 통장청·무예청·별감방 등 동궁 권역, 관원들의 처소가 있는 마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각문이었다. 창덕궁을 나올 때 동쪽의 마지막 문에 속하는 건양문을 나와 동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공식적인 동선은 회경문을 경유해 숭덕문을 지나 동궁의 중희당으로 들어간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의 숭덕문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1995~1999년에 동궁 권역을 복원할 때 복원되었고, 경희궁과 창덕궁의 숭덕문은 1900년대 초까지 존재하였다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이후 복원되지 못한 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형태

경복궁의 숭덕문은 담장 사이에 설치된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문으로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을 이었다. 창덕궁의 숭덕문은 행각의 끝에 평문으로 놓였고 정면·측면 모두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동궐도」 상에는 문이 열려있어 문짝이 없는 문처럼 표현되어 있다. 경희궁의 숭덕문은 「서궐도안」에 따르면 담장 사이에 설치된 솟을문이고 정면·측면 모두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이었는데, 문짝은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희빈장씨로 잘 알려진 장옥정은 한낱 궁인의 몸이었음에도 1686년(숙종 12)에 왕이 창덕궁 남쪽에 취선당이라 부르는 별당을 따로 지어 그녀의 처소로 삼게 했을 만큼 숙종의 총애가 유달리 컸다. 그로부터 불과 2년여 만에 나인 장씨는 숙원·귀인·소의에 올랐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에 취선당에서 훗날의 경종을 출산했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데다 아직 후사가 없는 왕실에서 왕자를 낳았으니 그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만 갔다. 그런 그녀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곱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13일에 큰 사건이 숭덕문 앞에서 터지고 말았다. 왕자를 낳은 장소의가 자신의 어머니를 불러들였는데, 그 어머니가 취선당 가까이 있던 숭덕문 앞까지 옥교를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옥교란 지붕이 있는 집처럼 생긴 가마를 말하는데 궁궐 안에서는 아무나 이러한 옥교를, 더구나 8명이 메는 가마인 8인교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들은 장소의의 어머니가 입궐하며 타고 들어온 가마라는 것을 알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들고 일어났고 왕은 장소의의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분노하며 해당 금리와 조례를 형벌로 다스려 죽게 만들었다(『숙종실록』 14년 11월 1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궁궐현판의 이해』, 문화재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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