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국(水産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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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산국 |
한글표제 | 수산국 |
한자표제 | 水産局 |
상위어 | 갑오개혁(甲午改革), 농상아문(農商衙門), 농상공부(農商工部) |
하위어 | 수산과(水産課), 염무과(鹽務課), 조사과(調査課), 참의(參議), 주사(主事) |
동의어 | 농무국(農務局) 산업과(産業課) |
관련어 | 농무아문(農務衙門), 사판위원(査辦委員), 탁지부(度支部), 해세(海稅), 어세(漁稅), 염세(鹽稅), 농광국(農鑛局) 농상과(農商課), 농무국(農務局) 식산과(殖産課), 어업세법(漁業稅法), 조일통어장장(朝日通漁章程)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왕대 | 고종~순종 |
집필자 | 은정태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3월, 1910년(순종 4) 8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산국(水産局) |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설치되었으며 농상아문 소속의 수산 정책 담당 부서.
개설
수산국은 갑오개혁 때 농상아문(農商衙門) 소속의 국(局) 단위로 설치되어 어업, 어선, 해산물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농상아문을 계승한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는 농무국 산업과가 수산 관련 업무를 맡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1907년(순조 1) 12월 수산국이 다시 독립된 국으로 설치되었으나 일본인 어민들의 조선 어업 침탈을 지원하는 행정 기구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에서 수산업은 기술적으로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정부는 어업과 제염업 등 수산업 분야를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으로만 관심을 두었고, 키워야 할 산업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어민들이 조선 연해로 침투해 왔다. 특히 1889년 「조일통어장장(朝日通漁章程)」을 발판으로 일본 어민들이 조선 연해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뒤떨어진 어구(漁具)와 어선으로 어업을 하고 있던 조선 어민들은 어장을 빼앗기거나 어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어민은 외국 어민이 조선 연해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소장(訴狀)을 올리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1894년 6월 갑오개혁 때 농상아문에 수산국이 설치되었다. 어업, 어선, 해산물 증식, 해산물 제조, 수산 회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국장인 참의(參議) 1명과 주사(主事) 2명이 정원이었는데, 국장은 산림국장이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때 수산국에는 관원이 임명되지 않는 등 실질적인 업무 추진은 거의 없었다.
1895년 3월 내각 관제로 개편하면서 농상아문과 공무아문(工務衙門)이 통합된 농상공부가 출범하자 수산국은 철폐되었다. 대신 농무국 산업과에서 어업, 어선, 어구에 관한 업무와 염전과 염정(鹽政)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관직 체계는 대한제국기 내내 이어졌다.
대한제국기 농상공부는 수산업 진흥과 관련된 뚜렷한 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해세(海稅) 징수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 어염 선박에 대한 관리와 보호는 농상공부가 담당하였고, 어세(漁稅)나 염세(鹽稅)는 탁지부 혹은 내장원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96년 6월부터 1898년 6월까지는 농상공부가 전국의 해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농상공부는 사판위원(査辦委員)을 파견하여 어염 선박을 조사한 후 세금을 징수하여, 경우에 따라 탁지부가 보낸 파원과 수세(收稅) 문제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농상공부농무국 산업과는 이들 파원이 조사한 전국 해세 관련 자료를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해세가 탁지부로 이관될 때 관련 자료 131책을 넘겨주기도 하였다.
어업과 관련해서는 일본 어민의 침탈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히려 1900년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에 요구하여 어장 구역을 경기도까지 확대하였고, 어류 판매 유통망까지 확대하였다. 조선 어민들은 일본의 발달된 어구와 어법을 수용하여 일본 어민과 경쟁하려고 했지만 정부의 지원 부족과 기술력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변천
1905년 2월 재정을 절약한다면서 일본인 고문관의 주도로 정부 관제를 대폭 축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산업 관련 업무는 농상공부 분과 규정에 따라 농광국(農鑛局) 농상과(農商課)에서 담당하게 되어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농무국(農務局)과 광무국(鑛務局)이 분리된 1906년 8월부터는 농무국 식산과(殖産課)가 이를 이어받았다.
1907년 12월 관제 개편으로 농상공부수산국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듬해 1월 공포된 분과 규정에 따르면, 수산국에는 수산과·염무과·조사과 3과가 설치되었다. 수산과의 업무는 ① 수산업 단속에 관한 사항 ② 수산업 경영과 면허 처분에 관한 사항 ③ 수산업 개량에 관한 사항 ④ 수산물 판매에 관한 사항 ⑤ 수산 시험 조사에 관한 사항 ⑥ 조합과 단체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염무과에서는 ① 염업의 경영과 면허 처분에 관한 사항 ② 염업의 개량에 관한 사항 ③ 제염의 판매에 관한 사항 ④ 제염의 시험 조사에 관한 사항을 맡았다. 조사과에서는 ① 수산업과 염업의 경제 조사에 관한 사항 ② 통계와 보고에 관한 사항 ③ 다른 과(課) 담당에 속하지 않은 사항을 맡도록 규정되었다.
수산국의 설치는 일본 수산업과 염업의 조선 침탈과 관련되었다. 일본 정부는 1904년 6월에 이미 어업 영역을 조선 전역으로 확대하였다. 1908년 10월에는 일본 어민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조선 연해에서 어업할 수 있는 어업권을 가졌다. 1908년 11월 「어업법」의 규정으로 조선에서의 어업권이 일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동시에 어염세 제도도 정비하여 1906년 11월 「염세규정(鹽稅規程)」, 1906년 12월 「수산세규칙(水産稅規則)」을 제정하여 수산업 경영의 면허 제도와 수산세에 대해 규정하였다. 이것은 1909년 3월 「어업세법」으로 정리되었다.
이처럼 수산업 경영과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1907년 12월 수산국이 설치된 것이다. 곧 수산국은 수산업 제도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하였지만 실상은 일본인 어민의 조선 수산업 진출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수산국의 역할과 그 분과 규정은 1910년 8월까지 약간의 변화 속에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박성준, 「대한제국기 해세 징수와 어염의 유통」,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 양상현, 「대한제국기 내장원 재정 관리 연구: 인삼·광산·포사(庖肆)·해세(海稅)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 이영학, 「개항 이후 일제의 어업 침투와 조선 어민의 대응」, 『역사와 현실』18, 1995.
- 이헌창, 「갑오·을미개혁기의 산업 정책」, 『한국사연구』9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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