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水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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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라 |
한글표제 | 수라 |
한자표제 | [水刺] |
하위어 | 진지(進止) |
관련어 | 반수라(飯水刺), 석수라(夕水剌), 수라상(水刺床), 어주(御廚), 조수라(朝水剌), 주수라(晝水刺), 죽수라(粥水刺)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복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라([水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5년 8월 23일 |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이르던 말.
개설
수라[水刺]는 왕에게 올리는 밥을 이르는 말인데, 수라를 짓는 주방인 수라간을 뜻하기도 했다. 궁중의 수라간은 어주(御廚)라고도 했다. 수라는 우리 고유어가 아니고 고려말 몽고의 부마국(駙馬國)이던 시대에 몽고어로 탕미(湯味)를 뜻하던 말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수라는 왕의 인생관에 따라서 사치스럽게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즐기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검박을 몸소 실천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수라는 왕과 왕비께 올리는 밥을 말하고, 왕족에게 올리는 밥은 진지(進止)라 하고, 궁인이나 내외빈에게 내는 상은 반상(飯床)이라고 구별하였다. 현재 널리 알려진 수라상은 조선말기 고종, 순종이 재위하던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기에 왕을 모시던 주방 상궁인 한희순(韓熙順)을 비롯한 지밀상궁들과 왕족들의 구전 자료에 근거한 12첩 수라상이다.
왕의 일상적인 식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1795년(정조 19) 정조 재위 시의 수라상 차림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찬품(饌品)조에 남아 있다. 을묘년은 고종 재위 당시보다 약 100년 전인데, 수라상의 형식과 구성이 상당히 다르다. 수라상의 내용은 재위하는 왕의 신념이나 당시의 자연환경과 사회 변화에 따라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일상 식사는 5차례인데, 이른 아침의 자리조반[初朝飯], 아침의 조수라(朝水剌)와 저녁의 석수라(夕水剌), 낮의 낮것[點心], 밤에 내는 야참[夜食]이다. 대개 이른 아침에는 보약을 드시고, 약을 안 드시는 날에는 미음·응이·죽을 차린 초조반을 드시고, 조수라는 10시가 지나 드시고, 석수라는 오후 5시경에 드셨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은 수라가 정해진 시각이 없었다고 한다(『숙종실록』 45년 8월 23일).
고종·순종 재위 시에는 흰수라인 백반(紅飯)과 팥수라인 홍반(紅飯) 2그릇을 상에 올리면 기호에 따라 골라 드셨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은 팥수라는 뚜껑도 안 열어보셨고, 윤비는 팥수라를 좋아했지만 나이가 드신 후에는 흰밥만 드셨다고 한다. 수라는 화로에 숯불[白炭]을 담아 놓고 새옹이라 하는 곱돌솥에 꼭 2그릇씩만 지었다. 이름난 지방에서 진상된 쌀로 지어서 밥 끓는 냄새가 마치 잣죽 끓이는 냄새같이 고소했다. 팥수라는 팥을 삶아 팥 건더기는 빼고 그 물만 가지고 밥을 지어 고운 분홍빛이 도는 밥이었다.
변천
조선조 궁중에서 왕과 왕비가 평소에 받는 진지상을 수라상이라 하였다. 수라상은 외상[獨床]으로 겸상(兼床)이 없고, 왕과 왕비의 것을 각각 따로 차렸다. 대왕대비전이나 세자궁에서의 진지상은 각 전각에서 따로 준비하여 차렸다.
궁중의 일상식에 대한 문헌자료로는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남아 있다. 1795년(정조 19)에 왕이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華城)의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푼 기록이다. 이 의궤에는 왕과 자궁(慈宮) 등이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 대접한 식단이 자세히 나오는데 특히 일상식에 해당하는 수라상과 죽상·미음상·소반과(小盤果)가 실려 있다.
1700년대 후반의 『원행을묘정리의궤』와 고종·순종 재위 때인 1800년대 말은 약 100년 차이가 있는데, 궁중의 상차림과 음식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에는 정조가 상시 머문 집은 짧은 처마와 좁은 방에 단청(丹靑)을 베풀지 않고, 수리를 허락하지 않아 가난한 선비[寒士]의 거처나 다름이 없고, 의복은 용포(龍袍) 외는 비단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고 세포(細布)의 굵은 것을 취하고 이불도 명주를 덮지 않고 조석(朝夕) 수라에 찬품을 3~4그릇에 더하지 않고 작은 접시에 많이 담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이는 정조의 평소 성품이 검박하여 수라의 찬품도 적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낮것[晝物]은 점심과 저녁 사이의 간단한 입매상으로 장국상 또는 다과상이고, 야참으로는 면·약식·식혜 또는 우유죽[酪粥] 등을 올렸다.
참고문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한중록(閑中錄)』
- 강인희, 『한국식생활사』, 삼영사, 1978.
- 김명길, 『낙선재 주변』, 중앙일보·동양방송,1977.
- 김상보,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수학사, 1995.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 신영훈, 『조선조 궁중생활연구』, 문화재관리국, 1992.
- 황혜성 외, 『李朝宮廷料理通攷』, 학총사, 1957.
- 김춘련, 「18세기 궁중음식고-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대한가정학회지』22(4), 1984.
- 이성우, 「조선왕조 궁중식에 관한 문헌학적 연구」, 『한국식문화학회지』1(1), 1986.
- 황혜성 외, 「궁중의 식생활」, 『한국음식대관』6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