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유(蘇子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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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를 볶아서 짜낸 기름.

개설

꿀풀과의 일년생 초본식물인 들깨를 볶은 후 기름을 짜서 얻는다. 특유의 진한 향과 맛이 있다. 조선에서는 식용하거나, 등불을 밝히거나, 방수용 도료 등으로 활용하였다. 들기름 또는 법유(法油)라고도 한다.

만드는 법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의하면, “들기름은 들깨 한 말에 기름 두 되가 난다. 들깨를 돗자리에 널어 낮에는 볕을 뵈고 밤에는 이슬 맞히기를 여러 날 하면 등잔에 켜도 그을음이 없고, 기름이 맑고 많이 난다. 묵은 깨는 한 해 묵었으면 하루 물에 담그고 이태면 이틀을 담가라. 날이 차 얼면 기름이 적게 난다. 급히 들기름 짜는 법은 생으로 찧어 밥 위에 쪄 내어 주머니에 넣어 도마를 덮고 돌로 누르면 기름이 자연히 흘러내린다.”고 하였다

들깨를 수확하면 말렸다가 깨끗하게 씻어 볶는다. 볶은 들깨를 자루에 넣어 무거운 것으로 눌러 기름을 짠다. 햇것일수록 기름이 많이 난다. 요즈음은 볶지 않고 용매를 이용한 추출법도 활용되고 있다. 들깨는 충청도 이남에서 재배되므로 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많이 이용하였다. 김에 발라 굽거나 나물을 무칠 때 쓴다.

연원 및 용도

중국과 인도가 원산지이고,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등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하고 있다. 한국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재배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자유(蘇子油)는 식용과 등유(燈油)로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찬유(饌油)와 등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의영고(義盈庫)에서 준비하여 등촉방, 수라간, 다인청에 바쳤다(『성종실록』 4년 10월 12일). 음식으로는 궁에서 과자를 지질 때 사용하였다.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제사나 잔치에는 더 많이 사용하였다.

인조대의 사간(司諫) 이상형(李尙馨)은 상소에서 선조 이후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 사치스러워 유청(油淸)의 수량이 40여 석에 이르렀다고 하며, 연회를 열 때에 어전에 차려진 과자는 모두 조청[假淸]과 들기름[法油]으로 구운 것으로 사치스러운 음식, 장욕(帳褥), 기구, 예단류 등이 굶주린 백성의 고혈에서 나온 것이므로 사신을 접대하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정조대에는 호조(戶曹)에서 사직(社稷) 기곡대제(祈穀大祭)에 쓸 제수(祭需) 품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조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는 은장(銀匠)과 동장(銅匠)에게 필요한 물품으로 들기름이 기록되어 있다. 송준길(宋浚吉)이 현종에게 『산릉제사초략(山陵祭祀草略)』을 올리면서 “제사 의식 중 촛불의 사용이 온당하지 못한데, 특히 노위(蘆葦) 몇 개를 종이로 싸서 우지(牛脂)와 법유(法油)를 발라 태우면 밝지도 않고 꺼지면 악취가 납니다. 사대부 집의 제사 때에도 촛불을 사용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독 국가의 제사에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물은 비록 창졸간에 변경할 수 없더라도 제사 촛불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현종실록』 10년 3월 11일). 정조대에는 무예청(武藝廳)에서 우의(雨衣)에 발라 방수용으로도 이용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사가집(四佳集)』에 보면 소자유를 등불로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옛날 시골집에서 소자유의 찌꺼기를 좁쌀겨[粟糠]와 혼합하여 등불을 붙여서 사용한 강등(糠燈)이 등장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규합총서(閨閤叢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