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사(사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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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에 국행수륙재를 설행했던 황해도 사리원시정방산의 절.

개설

성불사(成佛寺)는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고려말 나옹 화상이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초에 태종이 11개 불교 종파를 7개 종파로 통폐합하고 88개의 명찰(名刹)을 지정할 때 자은종의 소속 사찰로 등장한다. 단종대에 황주 지방에 악질이 돌았을 때 성불사에서 수륙재를 지낸 후 병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내용 및 변천

(1) 신라~고려시대

황해도정방산에 있는 성불사의 내력은 1727년(영조 3)에 수월재현(水月載玄)이 지은 「황주성불사사적비(黃州成佛寺事蹟碑)」에 전해온다. 그 사적비에 따르면, 성불사는 898년(신라 효공왕 2)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창건했다. 그리고 1375년(고려 우왕 2)에 나옹(懶翁) 화상이 크게 중창하여 부속 암자가 10채이고 석탑이 15개에 이르렀으며 1,000여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2) 조선전기

조선초에 태종이 11개 불교 종파를 7개 종파로 통폐합하고 각 종파의 88개 명찰(名刹)을 지정할 때 성불사는 자은종(慈恩宗)에 소속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그리고 1453년(단종 1)에 황해도 황주(黃州) 사람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황주 지방에 악질(惡疾)이 나돌아 관찰사가 왕에게 아뢰고 성불사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고 난 후 병의 기세가 누그러졌으니, 성불사에 전지(田地)를 지급하고 매년 봄·가을로 관리를 보내 제사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단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봄·가을로 여제(厲祭)를 행하도록 하였다(『단종실록』 1년 1월 21일). 그리고 성종대에는 비구니와 사대부가의 과부들이 무리를 거느리고 성불사에 가서 법회를 거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4년 7월 16일).

(3) 조선후기~일제강점기

1646년(인조 24)에 극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전각들이 소실(燒失)되었지만 1650년(효종 1)에 언택(彦澤)이 중수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도행(道行)이 400근의 큰 종을 만들었고, 1709년(숙종 35)에 육갑(六甲)이 명부상(冥府像)을 만들었으며, 1751년(영조 27)에 찬훈(贊訓) 대사가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불사는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20개의 말사와 1개의 산내말사를 관할하였으며, 1924년에 주지 이보담(李寶潭)이 명부전·향로전·청풍루·극락전·승방을 다시 지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1957년에 다시 복구되어 현재 극락전·응진전·명부전·산신각·운하당·청풍루·5층석탑 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황주성불사사적비(黃州成佛寺事蹟碑)」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정창현, 「황해북도 정방산과 숭덕산」, 『민족21』제139호, (주)민족이십일,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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