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장군(盛京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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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만주 지역을 관할한 성경부(盛京府) 소속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최고 장관.

개설

성경장군은 후금(後金)을 세운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후예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한 후, 발상지인 만주 일대의 방어와 치안을 위하여 후금의 도읍지였던 성경에 설치한 직책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만주는 청 황실의 발상지였다. 흩어져 있던 여러 여진 부족을 통합하고 만주를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워 오늘날 심양인 성경(盛京)을 도읍지로 삼았다. 청을 세우고 명을 멸망시킨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성경장군은 바로 심양의 방어를 책임진 장수였다.

성경장군은 조선과 접경한 만주 지역에서 큰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담당한 청나라 측의 최고 책임자였다. 달아난 도적의 처리, 국경 지역의 무역 마찰 등이 주로 문제가 되었다. 1710년(숙종 36) 성경장군송주(宋柱)가 해적의 잔당이 바다로 달아났다고 통고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연안 방비책을 논의하였으며, 이어서 평안도관찰사가 해적에 관한 정보를 올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1778년(정조 2)에 진주사(陳奏使)하은군(河恩君)이광(李垙)과 사은사겸진주정사(謝恩使兼陳奏正使)채제공(蔡濟恭)이 각각 귀국해 보고한 내용도, 성경장군이 만주에서 바다로 달아난 해적의 잔당을 붙잡아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1806년(순조 6)에는 재자관(齎咨官)이시승(李時升)이 귀국해 변경무역에 관한 성경장군의 조건을 비변사에 보고하고 있으며, 1812년(순조 12)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변경 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장군의 차칙(箚飭)을 아뢰고 있었다.

양국 사이의 변경 문제는 1883년(고종 20) 24조에 이르는 「봉천과 조선 변민교역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 체결로 일단락되었다. 장정에 따르면, 제6조에 안동현 지현(安東縣知縣)이나 의주부윤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때는 성경장군에게 보고해 지시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제19조에 조선 사신이 입경하였을 때 봉황성수위(鳳凰城守尉)의 보고를 받는 사람도 성경장군이었다.

조직 및 역할

성경장군은 주방팔기병영[駐防旗營]의 군정 사무를 총괄하고, 봉금(封禁)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요해처를 방어하였다. 장군아문(將軍衙門)은 주사(主事)와 필첩식(筆帖式) 등의 관원을 두어 소속 사무를 처리하였다. 성경장군 아래에 부도통(副都統) 4명, 부도통함총관(副都統銜總管) 1명, 성수위(城守尉) 8명, 협령(協領), 방수위(防守尉), 좌령(佐領), 방어(防御), 효기교(驍騎校) 등의 관직을 두어 주방팔기병영의 사무를 나누어 맡았다.

변천

1644년에 유수대신(留守大臣) 1명을 두었는데, 1646년에 앙방장경(昻邦章京)으로 바뀌었다. 1662년에 진수요동등처장군(鎭守遼東等處將軍)으로 고쳤으며, 1665년에 진수봉천등처장군(鎭守奉天等處將軍)으로 고쳐 불렀다. 1747년에 다시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으로 정하였다. 1907년에는 동삼성총독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최소자, 「청조의 대조선정책」, 『동양사학연구』 91, 2005.
  • 孟繁勇, 「淸代盛京將軍與陪都機構權力關係的演變」, 『社會科學輯刊』, 瀋陽, 2009.
  • 呂宗力 主編, 『中國歷代官制大辭典』, 北京出版社, 1994.
  • 張虹, 「盛京將軍設置考」, 『蘭臺世 界』, 瀋陽,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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