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점수세(設店收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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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광산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을 제공하고 경영에는 민간자본을 참여시켜 광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둔 제도.

개설

설점수세제는 1651년(효종 2) 호조에 의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은광개발이 투기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유치할 만큼 은광개발의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1687년(숙종 13) 실시된 설점수세제는 호조가 군영문 소관 은점(銀店)을 흡수하여 수세권을 독점한 후 부상대고를 별장(別將)으로 파견하여 관리·수세하도록 한 조치였다. 호조는 생산시설과 각종 자재를 공급하였다. 1775년(영조 51) 이후에는 수령수세제가 적용되었다.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상업자본에 의한 광산개발을 한층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 정부는 국방비와 중국과의 외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은광개발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이 부역을 기피하고 민간자본이 영세하여 광산개발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고자 1651년(효종 2) 호조에 의해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채택되었다. 이는 민간자본을 광산개발에 참여시키고 정부는 광산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은 물론 채굴에 필요한 재목·연료를 제공하여 광물 중 일부를 수세(收稅)하고자 한 조치였다. 하지만 당시 은광개발은 투기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당시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유치할 만큼 은광개발이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1687년(숙종 13) 실시된 설점수세제는 호조가 군영문 소관 은점(銀店)을 흡수하여 수세권을 독점한 후 부상대고를 별장으로 파견하여 관리·수세하도록 한 조치였다(『영조실록』 7년 10월 10일). 별장은 호조로부터 허가를 받아 현지 조사를 실시한 후 노동력을 모집하여 채굴에 착수하였다. 설점이 끝나면 점소(店所)에 머물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다가 세금을 거둘 때에만 현지에 내려왔다. 호조는 생산시설과 각종 자재를 공급하였고 두목(頭目)은 은점의 실질적 관리경영자로서 채굴과 제련 작업을 지휘 감독하여 생산한 은을 관장하고 분배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별장은 호조에 납부하는 세은(稅銀)과 자기 몫의 은을 받아 갔다. 채굴에 따른 세금은 은군(銀軍) 1명당 은 5전씩 산정되었으며 별장은 설점과 수세업무를 담당한 대가로 총 생산량의 2/3가량을 차지하였고 1/3가량이 두목과 은장(銀匠)·은군의 몫으로 배분되었다. 은군은 주로 농촌에서 유리된 빈민들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별장의 관리·감독 하에서 운영되던 설점수세제는 점차 쇠퇴하고 마침내 혁파되었다. 지방의 토호와 상인 등이 수령과 결탁하여 잠채(潛採)·사채(私採)를 자행하면서 별장제의 폐지를 획책하였다. 또 호조가 설점수세권을 독점한 후 재정원을 잃은 각 군문과 감영이 자의적인 잡세 부과를 일삼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순조실록』 28년 9월 5일).

1775년(영조 51) 이후 적용되기 시작한 수령수세제는 상업자본에 의한 광산개발을 한층 촉진시켰다. 별장제 하의 설점수세제가 호조의 자체 자금으로 점소(店所)를 설치하고 별장이 수세하는 방식이었던 반면,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물주(物主)가 호조의 허가를 받아 점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당해 지역의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수납하는 방식이었다. 물주로서 부상대고들은 채광시설과 자금을 투자하고 혈주(穴主)나 덕대(德大)들이 직접 광산을 경영하였다. 혈주나 덕대는 광산개발이나 현지의 사정에 밝은 사람들로서, 물주의 자본을 유치하여 점소를 설치하고 임노동자를 광군(鑛軍)으로 고용하였다. 덕대와 혈주는 물주의 몫과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지하였다. 이같이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혈주·덕대 등이 광군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취함으로써 그 이윤을 분배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 유승주, 『朝鮮時代鑛業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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