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薛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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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에서 주로 음식과 그 재료를 담당하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직.

개설

설리(薛里)는 궁궐의 각 전(殿)에서 주로 음식과 그 재료를 담당하던 내시부의 관리를 의미한다. 설리라는 명칭은 몽골 궁중에서 쓰던 용어로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섭리’라고 읽기도 한다. 설리는 내시부의 종4품에서 정7품 관원이 담당하였다. 종4품 상책(尙冊)은 대전(大殿) 설리이며, 정5품 상호(尙弧)는 태조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사당인 문소전(文昭殿) 설리였다. 종5품 상탕(尙帑)은 세자궁(世子宮) 설리였으며, 정6품 상세(尙洗)는 빈궁(嬪宮) 설리이고 정7품 상훤(尙煊)은 각 궁의 설리를 담당하였다. 여러 설리의 우두머리를 도설리(都薛里)라고 하며 왕의 음식 즉 어선(御膳)을 담당하였다. 또한 사옹원(司饔院) 설리를 도설리라고 하기도 하였다. 담당 임무는 궐내 식구들의 식사와 이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담당 직무

설리의 직무는 우선 소속된 전에 음식 올리는 것을 돕는 것이다. 평상시의 음식뿐만 아니라 왕이 신하들과 인견(引見)할 때 올리는 상(床)도 설리가 맡았다. 잔을 들어 올려 신하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신호를 주는 것도 설리의 직무였다(『중종실록』 23년 7월 13일). 왕이 승하하였을 때 혼전(魂殿)상식(上食)을 진설하는 것도 설리의 임무였으며(『명종실록』 2년 11월 16일), 국혼이나 연향(宴享)에 필요한 음식의 배설과 조리도 담당하였다(『선조실록』 35년 5월 23일).

설리는 음식의 진설을 위해 그 재료가 되는 물품, 특히 진상(進上)된 물품의 수량과 품질을 관장하였다(『선조실록』 35년 5월 23일). 진상이 이루어지는 생산지의 담당자, 예를 들어 어부(漁夫)를 관장하는 것도 설리의 직무였다(『중종실록』 7년 1월 6일). 연산군대에는 왕이 사슴의 꼬리와 혀를 즐겨 먹어서 매달 팔도에서 사슴 꼬리와 혀를 거두었으나 수효를 채우지 못하자 설리가 이를 사들여서 봉진(封進)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2일).

이러한 설리의 직무상 음식이 상하거나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재료가 어느 곳에서 봉진된 것인지 설리에게 물어보고 때로는 이로 인해 의금부에서 설리를 추고(推考)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3년 2월 8일). 또한 진상품을 관리하다 보니 설리들이 봉진된 물건을 훔치거나 물건을 올리는 어부들을 침탈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물품의 품질을 임의로 조정하는 등의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1년 10월 18일), (『영조실록』 49년 6월 6일).

설리는 이렇듯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을 담당하는 나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으로 업무차 내려갔을 때에는 감사와 수령도 관대하게 대해주며 그 세력에 붙으려 하였다(『중종실록』 9년 1월 27일).

변천

문종대에는 도설리의 인(印)을 주조하여 출납하는 물건에 찍도록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23일). 성종대에는 사헌부 감찰(監察)과 봉상시(奉常寺) 관원이 하던 문소전 물선에 대한 출납을 설리도 함께하도록 하였으나 예조(禮曹)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성종실록』 2년 4월 10일). 설리의 폐단이 여러 차례 지적되자 사옹원 도설리를 혁파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조종조(祖宗朝)부터 내력이 오래된 것이라 하여 폐지되지는 않았다(『중종실록』 12년 6월 22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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